옛날에 왕 근처에는 모든일을 기록하던 사람이 있었다는데요?
그럼 예를들어 태조께서 '12시에 변을 해결하러 뒷간에 가셨다' 이런식으로 하나하나 기록하나요? 만일 그러면 왕은 사생활이 없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요약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여 역사의 초고(草稿)를 쓰던 관원을 사관이라고 하였답니다.
삼국시대부터 역사 편찬에 따라 사관이 있었겠지만 명확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고려 때는 국초에 왕의 언행·정치·백관의 행적 등 모든 시정을 기록하는 관아로 사관을 설치하였으며 여기에 시중(侍中)이 겸직하는 감수국사, 2품관 이상이 겸직하는 수국사와 동수국사, 한림원의 3품관 이하가 겸직하는 수찬관, 직사관을 두었는데, 직접 실무를 맡은 수찬관, 직사관을 주로 사관(史官)이라 하였습니다.
그 직위는 매우 낮았으나 항상 임금 곁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것이 그 임무이므로 벼슬 중에서 가장 청화(淸華)한 것이며, 글을 잘하고 문벌이 좋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개 과거의 장원 급제자 중 문벌이 좋은 사람을 사관으로 임명하였고 문벌을 조사하여 흠이 없는 사람을 임명하였다고합니다.
사관은 승정원 옆에 거처하며 번을 갈라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와 함께 숙직하고 조회, 조참, 상참, 윤대 등 정례회의와 정치를 많이 논의하던 경연, 중신회의, 백관회의에도 참석하여 회의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한 명만 입시하게 하여 기록하였는데 불편이 있어 1425년(세종 7)부터 사관 2명이 좌우에 입시하여 말하는 바를 직접 받아썼으며, 왕이 내리는 교서는 반드시 사관을 거쳐 이를 초록(抄錄)한 뒤에 육조(六曹)·대간에 넘기게 하였습니다. 사관제도는 정확한 직필(直筆)로써 국가적인 사건, 왕의 언행, 백관의 잘잘못, 사회상 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정치를 하는 데 거울로 삼게 하려는 것으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또한 수정도 가하지 못하며 사관의 기록 행위도 일종의 면책권이 있어 신분이 보장되었다고합니다. 즉, 사관을 죽이거나 사관이 쓴 기록을 고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고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화장실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당시 왕이 뭔가 실수를 하거나 부끄러울때 사관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던 기록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가감없이 사실 그대로를 적었기 때문에 왕도 이를 신경쓸수밖에 없었습니다.
왕도 사생활은 있었겠지만 최대한 조심히 행동했을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간원은 왕실의 법령과 명령을 기록하는 일을 했는데, 일반적으로 왕이 잠자는 시간과 같은 개인적인 활동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공식 행사, 의식, 왕의 결정과 정책에 대한 기록을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승정원이라는 기구에서 담당하는 사람을 승지(承旨)라고 하며,
실제 기록하는 사람은 주서가 담당했습니다.
매시간 대마다 새로 작성하였으며,
날씨의 변화 정도와 측우기를 통한 강수량의 정도까지,
왕이 거한 궁을 중심으로 매우 상세하고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경연 장면에서는 왕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신하들과 경연을 하였는지,
저번에 읽다 만 책의 어느 부분까지 읽었는지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임금의 건강까지, 맥박이 어땠는지, 기침을 얼마나 했는지까지 기록했습니다.
이 정도였으니 화장실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왕과 승지는 한 몸처럼 생활했다고 보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옛날에는 왕실에서 일하는 기록관이 있었으며, 이들은 왕과 궁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록의 세부 사항이나 내용은 왕의 지시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기도 했으며, 왕의 사생활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태조께서 '12시에 변을 해결하러 뒷간에 가셨다'와 같은 세부적인 사항은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신, 왕이 어떤 일정을 가졌는지,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 누구와 만났는지 등의 대략적인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록들도 왕실의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또한, 왕궁에서 근무하는 기록관들은 왕의 명령을 받아 기록을 작성하였지만, 그들도 사람으로서의 생활이 있었고, 왕궁 내부에서의 생활이나 일상적인 활동들을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왕정 시대에는 "사관" 이라는 벼슬아치가 왕궁에서 모든 회의를 기록했으며 사관들은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과 주변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모든 기록물인 "사초" 를 만들었고 춘추관의 사관들은 3년 마다 자신들이 기록은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를 만들어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했고 사초와 시정기 모두 실록 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맞습니다.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사생활이 없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관이라고 불리였고 여러가지 사건 사고들을 기록을 담당했던 사람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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