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희는 국서(國書)를 들고 소손녕의 군영으로 향했다. 이때부터 소손녕과 서희의 기싸움이 시작됐다. 서희가 통역관에게 상견례 절차를 묻자, 소손녕은 "내가 큰 조정의 귀인이니, 네가 마땅히 뜰에서 절하라"고 했다. 요가 고려보다 국력이 강하기 때문에, 신하로서 왕에게 절을 하는 예를 갖추라는 의미다.
서희는 소손녕에게 굽힐 생각이 없었다. 서희는 "신하가 군주에게 아래에서 절을 올리는 것은 예의지만, 두 나라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후 통역관을 통해 절충을 모색했지만, 소손녕은 요지부동이었다.
서희는 소손녕의 무례한 태도에 단단히 화가 났고, 관사에 드러누운 채 며칠 동안 나오질 않았다. 예상치 못한 서희의 태도에 소손녕은 당황했다. 앞서 발해까지 멸망시키고 동북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거란 앞에서 당당하게 맞선 사신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배후에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소손녕은 한발짝 물러섰다. 소손녕은 통역관을 통해 사신으로서 서로가 대등한 예를 갖추겠다고 제안했고, 서희는 이에 응답했다. 서희와 소손녕은 만나 뜰에서 서로 맞절을 한 뒤, 마루로 올라가 예법에 맞게 동서로 마주 앉았다. 한참을 기싸움을 벌여서 인지, 서로는 계속 예의를 지키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소손녕은 그전처럼 고려에게 무분별하게 항복을 요구하지 않았고, 서희도 차분하게 설득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대화를 마친 이후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소손녕은 서희를 위해 연회를 열었고, 1주일 후 서희가 돌아갈 즈음엔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줬다.
결과적으로 고려가 거둔 외교적 성과도 컸다. 서희의 외교술 덕분에 고려는 거란과 더 이상 소모적인 전쟁을 치르지 않고 고토(故土, 옛 영토)를 수복하는 실익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