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기록된 내시는 누구인가요?
내시에 대해 보던중 문득 우리나라 역사상 기록된 가장 마지막 내시는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발자취는 어떠하였는지등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실의 ‘마지막 내시’였던 송은 이병직(1896~1973)이라고 합니다.
그는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삼국유사>를 비롯한 명품 서책, 서화류를 다수 갖고있던 부자 컬렉터였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할 정도로 사군자 치기에 능했던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원섭이 지은 왕실양명술(상,중,하)을 소개하는 설명에 보면..
『역대 왕실에서 제왕들의 건강술인 병의 치료에서부터 생명철학의 차원까지 비전되어 온 것들을 한 곳에 묶어 놓았다. 조선조 왕실의 마지막 내시 낭청 이재우로부터 손자인 이원섭씨가 이어받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며, 상·중·하 세권으로, 왕실의 세세한 생활의 지혜에서 불로불사의 무병장수법 또 내시 이재우의 예언에 이르기까지 미공개된 자료들을 기술하고 있다.』
즉, 조선 왕조의 마지막 내시는 낭청 이재우였습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마지막 내시는 반하경 (潘夏慶)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반하경 (潘夏慶)이라는 인물이 안장 돼 있다고 합니다. 그는 철종부터 고종, 순종까지 조선의 마지막 3대 (代) 임금을 모신 내시 (內侍)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반하경은 일제의 핍박이 심해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내시를 그만두고 경기도 파주 집으로 내려갔다는데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國權)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는 일주일 내내 음식먹기를 거부한 뒤 파주 삽다리 장터에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서를 꺼내고 자결했다고 전해 집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실의 마지막 내시는 이병직 입니다.
1973년 사망한 실질적인 조선의 마지막 내시였던 송은 이병직은 1896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로 남성을 제거한 것은 아니고 어려서 사고를 당해 고자가 된 후 서울의 내시 집안에 양자가 되었고, 양자로 간 내시 가문은 재산이 많아 쌀 7000석꾼으로 불리던 부자였습니다.
이병직은 내시였던 양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경기도 양주에 땅을 사 더 큰부를 이루고 강원도 홍천에서 가난한 소작농으로 살 운명이었던 이병직은 내시가 되었지만 곧 내시제도가 폐지되게 되며 궁에서 나와 서예를 배웠으며 그 후 서화가로 활동하면서 고서화와 골동품을 모아 수장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내시의 외모를 지녔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자격지심을 가졌고, 이용우에 의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놀림감이 되는데, 이용우는 이병직의 그림 옆에 일부러 괴상한 춘화를 그려 놓았는데, 고자인 이병직을 대놓고 놀릴 생각으로 한 행동입니다.
이용우는 사람들 앞에서 이병직에게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놀리며 웃었고 수치심에 이병직은 화도 한마디 못내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는 고자라고 심하게 놀림을 받았지만 대한민국 국보인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수집했고, 추사 김정희의 글과 난초 그림,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의 산수화 등 을 수집했습니다.
또한 교육에 관심이 많아 1937년 경기도 양주에 초등학교를 지은 후 무상으로 기증했고, 1939년 현 의정부중고등학교 전신인 양주중학교를 설립하면서 자시의 전 재산인 40만원을 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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