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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2.01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사람인데 어떻게 독일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돌프 히틀러는 알고보니까 독일사람이 아니더라구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독일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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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진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13세에 아버지를, 18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빈에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실패하였고, 독신자합숙소의 공영시설(公營施設)에서 숙박하면서 유산과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帝國) 내의 격렬한 민족투쟁의 와중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자가 되어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였으며,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증오하였다. 1913년 병역을 기피하여 뮌헨으로 피신했지만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장(鐵十字章)을 받았다. 독일이 패전한 후 뮌헨에서 공산혁명이 실패하였는데, 그 직후에 히틀러는 군대에서 정치교육을 받고 반(反)혁명사상으로 정신을 무장하였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스)이라는 반(反)유대주의적인 작은 정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웅변에 능하였고, 그 웅변의 힘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당세를 확장하였으며,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여 당의 선동가로서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이어 당내(黨內)의 독재자가 된 그는 군부 ·보수파(保守派)와 손잡고 민족공동체의 건설, 강대한 독일의 재건, 사회정책의 대대적인 확장, 베르사유조약의 타파, 민주공화제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유대인의 배척 등을 역설하였고, 특히 대중집회를 자주 열어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1923년 11월 8∼9일 뮌헨에서 봉기(히틀러의 봉기)를 획책했으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출옥 후 와해된 당의 조직을 재편하고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것을 꾀하였다. 옥중에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출판하여,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내의 여러 가지 경향을 종합 ·정리하고, 1930년 9월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18.3 %의 득표율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일생이 바로 나치스의 역사가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독재지배를 요구하였는데,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나 P.힌덴부르크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자본가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大生存圈)을 수립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하여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4년 7월 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保守帝政派)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반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그는 독신생활을 하였으나 그 동안에 질녀(姪女) 안겔라 라우발(1908∼1931)을 사랑하였고 그녀가 1931년 자살한 후로는 에바 브라운(1912∼1945)을 사랑하여, 그의 자살 전날에 결혼하였다. 또 그는 채식주의자이며 담배와 술도 하지 않았다. 밤에는 새벽 3,4시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며 아침에는 정오에 가까운 시간까지 침대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면서 현대문학이나 현대회화를 억압하였고, 19세기적 예술을 애호하여, 특히 각종의 장려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자기 주위에는 의사 ·사진사 ·운전기사 ·비서, 기타 정치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모아 두었으며, 개인생활에서는 정치관계자와 교제하지 않았다. 매사에 우왕좌왕하는 타입이었고, 그의 일이 순조롭게 되어갈 때에는 남의 의견도 잘 들었으나, 일단 결정된 방침은 결코 바꾸지 않는 옹고집이었다.

    사상적으로는 인종론자이었는데, 모든 인종은 우열(優劣)이 분명하여 열등인종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환경을 개선해 주어도 열악한 성격이 바꾸어지지 않으므로 멸종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인종의 성격은 유전적으로 확정되어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우수한 인종도 생존권을 확장하지 않거나 열등한 인종과 혼혈이 되면 몰락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 러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을 지배한 다음에는 미국을 타도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생각하였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국민이었는데 당시 히틀러는 민족주의에 극도로 심취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독일민족주의에 심취한 결과 오스트리아 정부가 발송한 징집명령을 거부하고 독일의 바이에른주로 도망을 갑니다. 바이에른주는 독일인만 살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바이에른군대에 자원입대해 전쟁에 참전합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민족주의가 2차 대전 당시 보다 약했습니다. 유대계 독일인들도 독일군으로 참전을 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여러 제국에는 귀족과 평민이라는 계급이 있었기 민족 보다는 계급이 더 일반적인 장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인, 체코인, 헝가리인 등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군대가 아니라 독일인으로만 구성된 독일군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합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독일제국의 동맹국인데다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라는 점 때문에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독일 국적이라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독일제국은 많은 왕국들과 공국들이 합쳐진 연방제 당시에 바이에른이라는 말은 바이에른왕국과 같습니다. 바이에른왕국이 독일제국의 일원으로 되었으나 바이에른왕국의 왕족, 귀족의 특권과 왕국의 영토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군대도 바이에른왕국의 국민들만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전쟁 때도 바이에른군대가 바이에른왕국의 귀족이 지휘하면서 독일제국군으로 참전했습니다.그래서 역사책에는 바이에른군에 자원입대했다라고 나옵니다. 결국 바이에른왕국으로 간 히틀러는 바이에른왕국 군대에 사병으로 자원 입대 하는데 스스로 입대를 하겠다고 하니 군대 입장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정확하게 말하면 독일제국군 예하 바이에른왕국 군대 소속 바이에른 16보병연대에 입대해 1차 대전에 참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