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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5.15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무엇인가요?

과거 중국에서 황건적의 난이란게 있었다던데, 말은 몇 번 들어봤지만 정확하게 어떤 사건인지 몰라서요. 어떤일을 계기로 난이 발생했고, 성공을 거뒀는 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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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5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건적의 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의 한나라 말기 영제가 통치하던 184년에 일어난 종교집단 태평도의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봉기 혹은 역성혁명이다.

    거록 출신인 장각이 후한 말기에 성행한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는 종교인 황로도(태평도)를 통해 신도들을 모아서 스스로를 "대현양사"라 자칭하고, 그 무리들을 모아 신봉자들에게 과오를 깨우치게 하고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 따위를 사용하여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치는 등의 전형적인 종교집단의 활동을 전개하여 무리들을 이끌어 모았다고 한다.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 황로도를 전파하여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의 8주에 무리들이 퍼졌으며, 황실의 환관들과 내통 약속을 받아내는 등 치밀하게 거사 준비를 했으나, 이 사실이 제자들의 밀고로 발각되자 동생인 장보, 장량과 함께 184년에 전국적으로 난을 일으켜서 각지의 주ㆍ군들을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이는 등 온 세상에 세력을 떨쳤다.

    그 뒤, 조정에서 황건적 때문에 고전하게 되자 당인(청류파)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서 그들을 중심으로 관군들이 편성되었고, 각지에서 황건적들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인하여 점차 진압이 되었고, 그 와중에 난의 주모자인 장각이 도중에 병사하여 중심을 잃었다.

    그럼에도 황건적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아서, 각지에서 독립적인 군소 세력이 할거[1]하였고, 이 때문에 때때로 지방관이 계속 토벌에 나서야 했다. 이들 잔당의 일부는 각 군웅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청주병. 황건적의 난은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어져 온 셈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아니 더 나아가서 앞으로 4백여 년 동안 이어질 위진남북조시대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대배경이기도 하다.

    출처: 나무위키 황건적의 난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한나라 말기 영제가 통치하던 184년 일어난 종교집단 태평도의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봉기, 역성혁명으로 거록 출신인 장각이 후한 말기에 성행한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는 종교인 황로도를 통해 신도들을 모아 스스로를 대현양사라 칭하고 그 무리들을 모아 신봉자들에게 과오를 깨우치게 하고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 따위를 사용해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치는 등으로 무리를 이끌어 모았고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 황로도를 전파해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 8주에 무리들이 퍼졌고 황실의 환관들과 내통 약속을 받아내는 등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나 이 사실이 제자들의 밀고로 발각되자 동생인 장보, 장량과 함께 184년 전국적으로 난을 일으켜 각지의 주, 군들을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이는 등 온 세상에 세력을 떨쳤습니다.

    그 뒤 조정에서 황건적 때문에 고전하게 되자 당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져 그들을 중심으로 관군들이 편성되었고, 각지에서 황건적들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들이 들고 일어서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점차 진압이 되었고 그 와중 난의 주모자인 장각이 도중에 병사해 중심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황건적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아 각지에서 독립적인 군소 세력이 할거했고 이 때문에 때때로 지방관이 계속 토벌에 나서야했는데 이들 잔당의 일부는 각 군웅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청주병입니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이 멸망할때까지 계속 이어져온 셈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한말(2세기 말) 악정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일으킨 대반란을 말합니다. 태평도의 창시자자인 장각이 주도 하였으며 음양 오행에서 흙의 덕을 나타내는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데에서 황건적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대규모로 일어났지만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난으로 말미암아 후한은 점점 쇠퇴해 멸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