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후 원균은 어찌하여 공격력에 오르게 된 것입니까
임진왜란 당시 원균는 해전에서 패배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많이 일으켰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이후에 공신에 오르게 됩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공신록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까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거부했다는 게 통설인데, 이순신은 이미 가토가 상륙하였음을 알고도 부산포로 출전했었다. 실록 1597년 2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2월 10일(이미 조정에서는 2월 6일에 체직이 확정된 상태였지만 그 소식을 전달할 선전관이 도달하기 전이었음) 김응서와 함께 부산포로 출전해서 늘 하던 것처럼 신나게 부수다가 돌아왔고, 원균이 했던 것처럼 가덕도에 하루 머물렀다. 이때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협상 후 포로들을 돌려받은 후에야 돌아갔다. 굳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후 원균의 졸전과 너무나도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의 병력은 겨우 62척이었고, 육군 장수 김응서와 합동했다.
실제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후에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21]를 점령해야 부산포로 출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원균 본인마저 수륙병진으로 부산포 출정을 주장했으니, 위의 수군 단독으로의 부산포 출정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원균은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이순신이 겁쟁이라서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자주 비난하는 발언을 했는데, 정작 그 역시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권율에게 호출당해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겪었고, 결국 여차저차 출전은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국 전쟁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병'원균' 누가 봐도 선조 양아들이라고밖에 안 보인다.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았다. 이때 원균은 인척으로 전라도 보성군에 살던 안중홍을 찾아와,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라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징비록에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자마자 기수열외를 자초하는 장면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징비록(2007년, 이재호, 역사의아침, 291p)
출처: 나무위키 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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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다가 전사한 공이 인정되어 공신록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균은 선조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지도 않았고, 공신으로 등재하여 자기의 덕을 보여주기 좋았던 것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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