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시어머니 며느리 사이 갈등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아무래도 서로 세대가 다르고 집안도 다른 사람들이 만났기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었겠지만 그래도 고부갈등은 다른 사람들이 만난 사례 중 가장 힘들고 특이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 역사에서 고부갈등이 사회문제로 표출된 적이 언제부터였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부갈등, 시집살이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생의 대명사 같은 ‘시집살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왜 근래까지 500년 이상의 장구한 생명을 유지해왔는가?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시대의 배경에서 찾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집살이는 봉건사회의 부산물로서 철저한 남존여비와 효도지상의 유교윤리, 그리고 가난과 조혼의 풍습 등 사회적 병폐 속에서 생겨났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남존여비와 삼종지법
여성사에서 볼 때, 조선시대야말로 우리나라 여성에게는 최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원시 샤머니즘사회의 사제자(司祭者)로서의 여무(女巫)의 위치라든가, 모권사회의 일을 그만두고라도 신라시대만 하여도 여왕이 셋이나 나왔다는 사실로써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또, 고려시대에도 신라 때만큼은 못해도 조선시대같이 비참하지는 않았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이른바 ‘남녀이합무상(男女離合無常)’이라는 말과 같이 연애가 자유로웠고 왕실에서조차 여성의 재혼이 가능할 정도로 남녀의 인권에 어떠한 제도적 차별대우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주자학의 수입으로 고려말부터 차츰 떨어지기 시작한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완전히 제도적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 근본을 이루는 것이 남존여비와 삼종의 법이다.
예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상 위에 누이고 구슬을 주어 놀게 하고, 딸을 낳으면 상 아래 누여서 실패를 가지고 놀게 한다[弄璋之慶弄瓦之慶].”고 하였듯이 다같은 혈육이건만 남녀는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귀천으로 갈라져서 차별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가정내에서도 ‘남편은 곧 아내의 하늘[夫乃婦天]’이라는 사상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남편을 3인칭으로 ‘소천(所天)’이라 부르기도 하며, 손님같이 공손히 받드는 것이 아내의 미덕이라 하였다.
자기에게 의견이 있어도 남편이 하는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설사 남편이 “소금섬을 물로 끌라.”고 하여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하는[女必從夫] 유교원리는 ‘여자의 음성이 중문 밖에 나가면 그 집의 법도를 알겠다.’느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하여 여자는 유순과 복종만이 미덕이라 일컬어 왔다. 여자에게 강요된 복종은 남편에게뿐만 아니라 출가 전에는 부모의 명령을 좇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하였다. 이것이 곧 삼종이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여자는 일생 중문 안에 갇혀서 신분이 높을수록 바깥세상을 모른 채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奉祭祀],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고[事舅姑, 事夫], 시가 형제 및 동서들과 우애있게 지내고[善姨姒], 노복을 다스리고[御奴僕], 손님을 대접하는[接賓客] 일이 본분이었다. 이것을 여자의 여섯 가지 도리라 하였다. 그런데 노비를 거느릴 수 있는 계층의 여인이라면 육체적 노동은 면하였을 것이니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 고통 못지않다는 것은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남이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문학작품 속의 허구뿐 아니라 실지로 8·15광복 전까지만 해도 상류가정에서 가끔 일어난 며느리의 자살사건이다.
이같은 남존여비사상과 삼종의 법이 시집살이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그것은 시집식구를 상전시(上典視)하여 남편의 형제들에게 ‘서방님’·‘도련님’·‘작은아씨’(또는 아기씨) 등을 받쳐부르는 말씨에 며느리의 지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효됴지상주의
유교이념을 국시로 삼고 철저히 예악(禮樂)으로 시종한 조선시대에는 ‘효’를 백 가지 행실의 으뜸으로 삼았다. 효행은 조상에게는 봉제사라는 형식으로, 살아계신 부모에게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이라 하여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주고 아침에는 이를 돌아보는 조석봉양으로써 실천하는 것이다.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韓氏)가 쓴 ≪내훈 內訓≫에 “시아버지·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얻음은 효도하게 함이니 진실로 그렇지 못하면 너를 얻어 무엇에 쓰리오.”라는 대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봉건시대의 결혼관은 효를 목적으로 삼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즉,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시부모를 섬기며,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기 위함이다. 따라서 효는 모든 면에 앞서므로 부부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부모가 마땅해 하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였다.
역시 ≪내훈≫에 “자식이 심히 그 처를 좋아하더라도 부모가 기뻐하지 않으면 내치고, 자식은 그 처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부모가 좋아하시면 부부의 도를 지켜 끝까지 함께 마친다.”는 구절이 보인다.
즉, 봉건시대의 결혼이란 오늘날과 같은 1:1의 남녀 결합이 아니라, 한 가문이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애당초 아내를 맞이할 때 본인의 의사가 무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쫓을 때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가 없다는 이치이다. 그러기에 ‘계집은 다시 얻으면 그만이지만 부모는 한 번 가시면 다시 모실 수 없다.’는 것이 봉건윤리에서 나온 부부관이다.
속담에 ‘지나친 효자는 아내가 외롭다.’고 하였듯이, 며느리의 입장에서 볼 때, 남편의 존재는 시집살이에 별로 크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집살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거하면서 고부 간의 갈등은 시작되었고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동거하더라도 며느리는 힘겨운 시집살이에 내몰리지 않을 정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 들어 장자의 처인 맏며느리가 갖던 제사 주재 권한이 시어머니로 점차 넘어가게 되면서 둘의 갈등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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