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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9.19

성삼문들을 실제로 충신이라고 볼 수 있나요?

단종복위를 계획했다가 발각된 사육신은 단종이 이 일에 연루되어있다고 국문도중 말해서 단종을 위기에 빠지게 만드는데 정말 충신이었다면 이런식으로 단종을 위험에 빠트리지않았을텐데 단순히 충신이기보다는 자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는 욕심을 가지다가 일이 틀어진것으로 보는것이 맞지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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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9.1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현대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 때 홍성군의 노은서원이 헐리자, 후일 홍성의 유림들은 위패를 근처에 묻고 노은단을 세워서 계속 제사하고 있습니다.

    1910년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육신은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져왔고 성삼문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았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가 현창되었고, 1970년대에 와서는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본부인의 묘소와 아버지 성승과 생모의 묘소가 모두 성역화되었습니다.

    논산군에 있는 시신 일부를 매장한 묘소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조의 권력찬탈에 맞서서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성삼문은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라는 단심가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다루어진 인물로 충절의 대명사로 불리웁니다. 자신의 권력을 탐했다면 신숙주처럼 세조편에 서서 일신상의 안락을 꾀했겠지요 불의에 대한 저항을 온몸으로 보여준 성삼문이라는 충신이 있었기에 그를 기리며 그 뜻을 따르고자 가르치는 것이겠지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들이 진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역사는 개인의 주관적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삼문은 적어도 김질 처럼 중간에 말을 갈아 타고 역모 사건을 세조에게 고변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박팽년, 하위지등과 같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 하다가 붙잡혀 모진 형벌을 받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이 고문 과정에서 단종이 연루 되었다는 말을 성삼문이 했다고 전해 져 오나 이것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성삼문이 왜 충신인지는 디음 기록이 전해 지는데 고문을 받을 때 세조가 묻는데 "거취를 분명히 하라"그러자 성삼문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 청청하리라"고 답합니다. 세조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를 알고 세조가 성삼문을 직접 심문할 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세조가 다시 묻기를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은 왜 먹었느냐?”그러자 성삼문은“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 보라고" 했는데 정말 받은 녹봉이 전부 다 그대로 집에 쎃여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