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나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나요?
그리고 사무라이는 어떤 무기와 전투 기술을 사용했나요?
주로 사용되는 무기와 전투 스타일이 어땠는지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오랫동안 겪으면서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기를 오래 겪어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등장한 것이 사무라이 계급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군인) 계급을 일컫는 말. 시대에 따라서는 사족(士族)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그 일컫는 범위와 위상을 생각하자면 유럽의 기사(knight, 騎士)와 유사하다. 일본도와 화려하게 장식된 일본 갑주 및 뿔 장식이 달린 투구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적 상징으로 외국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사무라이 어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라이라는 말의 등장은 헤이안 시대이다. 귀족들을 경호해주는 사람을 사무라이라고 부른 것이 시작인데, 구체적으로는 '시중들다'를 의미하는 옛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 당시 표기로는 さぶらふ)에서 유래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모라우(さもらふ)라고 썼던 것이 말이 변해 사부라우가 된 것인데, '사부라우'의 명사형(시중드는 사람)이 사부라이(さぶらひ)이고 이것이 다시 변형되어 사무라이(さむらひ)가 되었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무라이는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했던 아스카 시대가 끝나가고 점차 세력을 키운 귀족들의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었던 시기에 생겨났습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명문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천황을 제치고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까지 천황의 황권에 의해 통치되었던 일본의 질서는 해이해져갔고 이에 따라 10세기 초부터 일본의 율령제가 무너지게 됩니다.
중앙집권질서가 무너지자 중앙기관은 더 이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며 결국 쇠약해진 중앙 기관은 지방의 세력가들인 고쿠시 들에게 중앙 기관을 대신해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데 이들 고쿠시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유력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사업을 맡기는데 이들을 다토 라 합니다.
그러나 다토들이 스스로 토지를 개간해 새로운 경작지를 만들고 스스로 영주라 자처하며 다토와 고코시 간에 권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 고쿠시에 비해 비교적 세력이 미약했던 다토들은 중앙권력자에게 자신의 땅을 바쳐 세력을 키웠고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해지면서 다토들은 싸움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력집단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무력집단의 일부가 중앙귀족의 눈에 들어 귀족의 사병으로 종사하는 시종이 되는데 이 시종에서 나온 것이 사무라이 입니다.
사무라이는 처음에는 기병으로 활동, 무로마치 막부 중기 이후부터 일본 내에서 말 수급이 어렵고 양성기간도 긴 기병들이 쇠퇴하고 대신 점점 늘어나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보병들로 주력 병종이 대체되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무라이들도 보병화되었고, 칼과 활, 창을 주력으로 가지고 다녔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래 일본에서 귀족들을 경호해주는 사람을 사무라이라고 부른 것이 시작입니다.
이들은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무라이의 기원은 천황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던 아스카 시대가 끝나가고 점차 세력을 키운 귀족들의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었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명문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천황을 제치고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까지 천황의 황권에 의해 통치되었던 일본의 질서는 해이해져갔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부터 일본의 율령제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 집권 질서가 무너지자 중앙 기관은 더 이상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쇠약해진 중앙 기관은 지방의 세력가들인 '고쿠시'들에게 중앙 기관을 대신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려주었다. 이들 고쿠시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통치하게 위해서 유력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사업을 맡겼는데, 이들을 '다토'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토들이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경작지를 만들고는 스스로 영주라고 자처하면서 다토와 고쿠시 간에 권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고쿠시에 비해 비교적 세력이 미약했던 다토들은 중앙권력자에게 자신의 땅을 바쳐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번져갔다. 다토들은 싸움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무력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무력집단의 일부가 중앙귀족의 눈에 들어 귀족의 사병으로 종사하는 시종(侍從)이 되는데, 이 시종에서 나온 것이 사무라이(侍)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는 귀족의 경호원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무사들까지 통틀어 이르는 말로 변질되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무라이 문화
우리나라와 일본이 항시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양상을 보이는 것은, 유교 문화라는 같은 '종자'가 각각의 다른 정치적 관습이나 사회적 풍토라는 '토양'과 '기후'에 의해 각기 다르게 배양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양' 이나 '기후'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유교 문화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산물을 낳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의 '선비'와 일본의 '사무라이(侍, 武士)'이다.
우리나라에서 선비의 뜻으로 쓰이는 '士'는 일본에서 '사무라이'의 뜻으로 쓰이며,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는 '선비정신'이 일본에는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있다.
<정(靜)의 선비 - 동(動)의 사무라이>
우리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건국과 도쿠가와 정권의 수립이라는 비슷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교의 일학인 주자학을 받아들였다.
이는 주자학이 신분 차별을 인정하고 대의명분을 내세워 군신관계와 충군애국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봉건적인 지배 체계를 견고히 하는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나라와 일본은 주자학의 '충효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는데, 두 나라의 각기 다른 사회적 정치적인 여건은 두 나라가 주자학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우리나라는 '효'의 이념에, 일본은 '충'의 이념에 더 많은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의 지배 계층이나 지식인 사회에서는 효와 문(文)을 숭상하는 '선비사상'이 강조되는 반면, 일본에서는 주군에 대한 충성과 무(武)를 중시하는 '사무라이 정신'이 강조되었다.
이로 인해, '선비'와 '사무라이'는 같은 유교 사회의 지배 계급이자 엘리트였음에도, 선비는 유교적 덕치(德治), 인정주의(仁政主義)에 바탕을 둔 정(靜)적이고 방어적인 성향, 사무라이는 충군애국에 바탕을 둔 동(動)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으로 대비되었다.
<사무라이의 등장>
사무라이는 교토(京都)로부터 토고쿠(東國) 지방에서 일어난 무장 개척 농민의 수령 층이 점차로 토착 지방 세력으로 대두되어 생겨난 계급이다.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그들은 점차로 율령 체제와 귀족들의 토지를 잠식하여 12세기 말,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라는 양대 무사 집단의 무력 충돌 끝에 마침내 무력 정권의 탄생을 맞이한다.
이 때부터 일본은 - 사무라이라는 신분이 폐지되는 메이지 유신까지 - 사무라이가 거의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사실 사무라이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농업을 겸하면서 유사시에만 사무라이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것이 16세기 말 도요토미의 병, 농 분리 정책으로 농민에서 분리된 하나의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군사 엘리트에서 문화 엘리트로>
사무라이의 정치 체제를 이른바 바쿠한(幕藩) 체제라고 한다.
이것은 중앙 정부 격인 '바쿠후(幕府)'와 지방 자치 격인 '한(藩)'으로 이루어진 봉건 정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인데, 이 바쿠후는 무사 관료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문인 관료가 나아갈 자리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인 관료는 굳이 말하자면 세습으로 이어지는 공가(公家)였다.
그들은 실권이 없었으며 조정에 종사할 뿐, 정치의 무대로 나가지는 않았다. 1192년에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들어선 이후부터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의 676년간, 교토에 천황의 조정이 있었다고는 해도 일본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무가의 동량(棟梁)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무라이는 정치적 실권 계층으로서, 이 '文'의 공백을 메워야만 했다.
사무라이가 학문이나 교양을 몸에 익혀, 거친 군사 엘리트적 성향을 탈피하고 문화 엘리트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17세기에 시작되는 도쿠가와 바쿠후 정권 수립 이후부터이다.
근 1세기에 걸쳐 전국(戰國) 시대를 지나, 16세기 말에 시작된 오다 노부나가(纖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이어진 전국 평정 속에서 바쿠후와 한(藩)이라는 지방 정권 분립의 체계가 완성되고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면서, 처음으로 사무라이는 '文'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문'과 '무'를 분리하여 과거 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문관 우위의 행정 제도였으나, 이 때부터 일본에서는 '무'가 '문'을 겸하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법도를 지키는 자만이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사무라이에게는 세 가지의 특권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의 특권과 타이토(帶刀)라는 특권, 그리고 묘지(名字)의 특권이었다.
기리스테고멘은 평민이 사무라이에게 누를 범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벨 수 있는 특권이며, 타이토는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 그리고 묘지는 성(姓)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姓)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특권이 부여되는 만큼 특권을 누리는 자로서 지켜야 할 생활 규범 또한 엄격했다.
그들은 무사도에 어긋나지 않는 사무라이로서의 생활 규범을 엄격히 준수해야 했으며 생활 또한 사치스러워서는 안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사무라이가 문과 무를 겸하는 문화 엘리트로 탈바꿈하면서, 사무라이에게는 무사로서의 예법이나 무술 훈련뿐만 아니라 중국의 학문 전반에 관한 지식이나 교양도 요구되었다.
'선비'와 '사무라이'는 각 나라의 유교 사회를 이끌었던 이른바 정치 엘리트였다.
이들에게는 지배 계층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이행해야 할 여러 가지 규범 내지는 법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선비가 유교 논리의 실천이나 학문상의 윤리 문제를 중요시했다면, 사무라이는 관료로서의 통치 능력 내지는 주군에 대한 충성을 강요함으로써 신분 질서 확립에 보다 주안점을 두었다.
일본의 유교가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자학이 목표로 하는 문관(文官)이 곧 치자(治者)라는 문치사상(文治思想)이 아닌, 바로 이러한 무가 사회의 '충' 개념을 더욱 중요시한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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