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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3.05.21

고구려에도 신라처럼 금관이 있었나요?

금관이라고 하면 신라의 금관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데요, 백제의 금관도 박물관에서 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신라처럼 금관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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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네. 발견된 유물로 봤을 때 고구려에도 금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황금관(黃金冠)이다. 전 세계의 고대왕국(古代王國)에서 제작되어 전해지는 금관은 모두 12점에 불과하다. 이 고구려 금관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금관이 10점으로 신라금관 7점, 가야금관 2점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경주의 왕릉급 신라고분속의 금관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금관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왕릉급 고분은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달리 돌방형 석실분으로 도굴에 매우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져서 고구려 멸망 이후 근대까지 약 1300여년동안 끊임없이 도굴 훼손되어왔다. 때문에 현재까지 고구려의 왕릉급 고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된 사례가 한번도 없으며 여러 번에 걸쳐 도굴된 후 간신히 남아있는 유물이나 과거 혼란기에 도굴되어 전해지는 전세품 등으로 추정하여 고구려인의 문화수준, 생활풍습, 부장풍습 등을 추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구려 유물이 빈약한 상황에서 이 금관의 발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에서 출토되었다는 당시에 기록한 묵서(墨書)와 고구려 금귀고리 1쌍, 고구려 금동유물 수십여점이 함께 박선희 교수에 의하여 연구 발표되었다.1)

    이 고구려금관의 기본형식은 관테에 두 종류의 불꽃무늬 세움 장식 7개를 이어 붙인 전형적인 삼국시대 금관양식이다. 모두 242개의 달개장식을 달아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며 금관 테에는 16과의 꽃문양을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다. 이 금관의 세움 장식인 불꽃문양은 고구려 벽화고분에도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서기 408년(광개토태왕18년)에 조성된 덕흥리 벽화고분의 불꽃장식과 거의 유사하다.

    고대왕국의 태양숭배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내재적인 공통된 신앙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자리 잡았으며 태양의 불멸사상과 만물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공통적인 의식이 작용하였다. 고구려 역시 태양의 존재로 영원 불멸의 화염문을 제왕의 금관이나 왕릉급의 벽화고분에 벽화문양으로 사용한 것이다. 태양을 대신할 수 있는 영원불멸의 물질로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금(金)으로, 절대왕권의 고구려 태왕(太王)만이 이 금관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나 가야의 금관 보다 세움 장식이 훨씬 복잡하여 금판을 오려내는 제작과정도 몇 배 힘들었을 것이다<사진89>. 이 고구려 금관은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가야금관처럼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출토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당시의 묵서명이 남아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동안 거의 도굴된 고구려고분에서 잔편(殘片)으로만 추정하던 고구려금관의 실체를 1500여 년 만에 후손들에게 알려주었고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와 숨겨진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 고구려금관은 금의 성분분석, 세움 장식판의 절단기법, 관테와 달개장식의 이음기법, 금사(金絲)의 연결방법, 금판에 침착된 유기물과 점선조기법(點線彫技法)의 특징<사진90> 등이 기존의 금제 고구려유물의 특성과 동일하며 동반출토유물로 같이 발표된 금제귀고리, 금동마구, 금동못, 금동장신구 등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구려 유물과도 일치한다. 특히, 고구려의 중요한 유적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우리로서는 이 고구려금관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넘어서 우리민족과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 [高句麗火焰文金冠] (박물관에선 볼 수 없는 문화재, 2014. 12. 5., 김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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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동안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총 9개의 금관들은 6개가 신라 시대의 것이고 3개가 가야의 금관 이였다고 합니다. 고구려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 이유가 고구려의 위치가 북한 및 중국에 위치 한데다 도굴을 하도 많이 당해서라고 합니다. 얼마전 처음으로 불꽃 금관이라고 하는 것이 북한 지역에서 공개가 됬는데 정확한 시기나 연도는 미 확인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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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금관(新羅金冠)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제 관.

    개설

    신라고분에서는 공식적으로 5점의 금관이 출토되었고, 국가에서 압수한 도굴된 금관 1점을 합하면 모두 6점의 금관이 현존한다. 금판을 오리고 붙여 만든 것이며, 아래쪽에 둥근 관테[臺輪]가 있고 그 위로 5개의 세움장식[立飾]을 부착한 것이다. 세움장식은 나뭇가지모양과 사슴뿔모양이다. 금관의 표면에는 비취(翡翠) 곱은옥[曲玉]과 금판을 둥글게 오려 만든 달개[瓔珞]가 많이 달려 있다.

    연원 및 변천

    신라금관의 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유목 민족이 신라로 이주하면서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와 신라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신라 금관의 나뭇가지모양과 사슴뿔모양 장식이 시베리아 샤먼(shaman)이 착용했던 관과 유사하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베리아 샤먼이 썼던 관과 신라 금관 사이의 시간·공간적 틈이 너무나 큰 것이 문제이다. 그 때문에 신라인들이 북방의 황금문화를 수용하여 그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해온 도안에 접목, 금관을 창작하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5점의 신라 금관은 5∼6세기에 제작된 것이며 약 100년의 시간 폭을 지닌다. 금관 출토 고분의 연대, 금관의 도안과 제작기법에 주목해보면, 황남대총 북분 금관 → 금관총 금관 → 서봉총 금관 → 천마총 금관 → 금령총 금관 순으로 금관 제작 순서를 추정할 수 있다.

    내용

    신라의 금관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관테 위에 나뭇가지모양 장식 3개, 사슴뿔모양 장식 2개 등 모두 5개의 장식을 덧붙인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둥글게 말은 관테의 끝(후면에 위치)에 각각 둥근 구멍이 뚫려 있으며 못이나 금속선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금동관 가운데는 금속선이나 못으로 고정한 예가 많아 금관과는 양상이 다소 다르다.

    이와는 달리 금관들 사이에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첫째, 나뭇가지모양 장식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관 산(山)자형 장식이 3단이지만 금령총이나 천마총 금관은 4단이다. 이러한 차이는 금관 제작의 시기차를 반영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달개나 곱은옥의 수량과 금판에 베풀어진 무늬도 다른데 이 또한 금관이 유행하던 시기마다 세부적인 양식차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변화는 간단한 것에서 복잡·화려해지는 방향이다. 둘째, 5점의 금관 가운데 유독 금령총 금관에만 곱은옥이 달려 있지 않으며 사슴뿔모양 장식 역시 1매의 금속판으로 만들지 않고 세부 장식을 별도로 만들어 붙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신라금관은 왕릉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와 왕족 여성의 무덤에서도 발굴되었다. 그 때문에 금관이 곧 왕관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에는 신라 금관의 제작기법이 매우 거친 점, 부장방식이 특이한 점 등을 들어 장송의례용 부장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 금관에는 몇 가지 상징성 강한 도안이 표현되어 있다. 즉, 세움장식의 형태가 나뭇가지와 사슴뿔모양을 띠고 있으며 관에는 곱은옥이 가득 매달려 있다. 금관에 표현된 나뭇가지는 하늘로 통하는 통로이자 생명수, 사슴뿔은 하늘의 정령을 받아들이는 장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곱은옥에 대해서는 원초적 생명체로 보며 저승에서 부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신라 금관의 이러한 장식은 금관의 출토양상과도 관련된다. 금관은 거대한 무덤 속에 한정적으로 부장되며 최고의 공예품과 함께 묻혀 있다. 현세의 지위나 경제력이 우월한 신라의 왕족과 그 측근들은 인생의 한정성을 깨닫게 되면서 사후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자신의 삶이 영원하기를 희구하였다. 그들은 현세의 삶이 내세로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아서 금관을 비롯한 수많은 물품을 무덤 속에 부장했는데, 심지어는 시중들던 사람까지도 함께 묻었다.

    신라금관이 제작되었던 시대에는 금관뿐만 아니라 금귀걸이, 금목걸이, 금반지, 금동신발, 장식대도 등 화려한 금속공예품 또한 유행하였다. 그런데 절정기에 오른 신라의 황금문화는 더 이상 꽃피지 못하였다. 6세기 신라사회는 마치 큰 소용돌이와도 같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었다. 그러면서 신라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국가에서도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 같은 큰 무덤과 각종 황금장식이 차츰 사라지게 된다. 금관 역시 그러한 변화의 와중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황금으로 만든 각종 장식은 사찰의 불상이나 사리공양품 등 불교공예품으로 거듭나게 된다.

    현황

    현재까지 발굴된 금관은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출토품 등 5점이다.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한편 도굴 후 국가에서 압수한 금관 1점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경주시 교동의 폐고분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신라 금관은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매우 상징성이 강한 유물이다. 경주 시내에 대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을 축조하던 신라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소망을 금관의 도안에 담아냈던 것이다. 결국 금관을 통해 우리는 신라인들이 지녔던 내세에 대한 인식을 일부나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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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고구려의 경우 금관은 불꽃모양 금관이 대표적으로 출토되었고, 이 외에 모자에 붙이던 금제관식이나 장신구 등을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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