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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그늘나비112
정직한그늘나비11220.05.18

5.18 민주화 항쟁은 어떻게 시작된 민주화 운동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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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비상계엄이 지속되는 가운데 서울의 봄이 유동적으로 흘러가던 4월 14일 전두환 합수부장은 중앙정보부 부장직을 겸하게 되면서 신군부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최고권력자임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켰다. 명목상의 최규하 과도정부와 전두환의 실질권력이 공존하고 있었던 서울의 봄 상황에서 친여신당설과 이원집정부제 개헌론 제기는 신군부의 실질권력을 제도화하려는 것이었다.

    안개정국의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1980년 5월 학생들의 반군부 가두시위가 열기를 더해가자 이에 부응하여 여야 정치권도 계엄해제 촉구와 유신헌법 개헌에 합의함으로써 신군부의 정권장악 의도에 제동을 걸었다. 이렇게 계엄해제와 유신헌법 개헌을 둘러싸고 신군부와 민주화세력 간의 대치가 팽팽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불확실성의 상황에서 이를 보다 더 긴급하고 절실한 생사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신군부는 자신들의 우월한 물리력을 활용하는 모종의 비정상적인 조치를 찾아 나선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바로 신군부의 권력장악 시나리오에 반대하면서 그 자체의 역동성과 민중적 활력을 추동시켜나간 민주항쟁이었다.

    1979~1980년은 마이너스 경제성장과 박정희의 갑작스런 피살에 따른 사회적 불안·위기의식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력과 언론통제를 확보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포고령 10호를 통해 국회와 대학 폐쇄, 모든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파업금지 등을 발표하였다.

    포고령 발표의 이유는 학생들의 민주화 가두시위로 인해 야기된 혼란을 막겠다는 것이었지만 단순하게 학생시위에 대처하는 방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한 군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곧 신군부의 권력장악 의지가 발동되었다는 것이었다. 5·17 계엄확대는 유력한 야당정치인인 김대중을 정부전복 기도 혐의로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시킴으로써 사실상 12·12 하극상에 이어 군부의 권력장악 의지가 개입된 또 한 번의 쿠데타이자 정권장악의 마무리 수순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은 바로 이러한 군부의 불법적 정권탈취에 저항했던 아래로부터의 항의이자 이러한 항의를 무자비하게 억누른 군부의 인민학살을 지칭한다. 광주항쟁은 군부의 정치적 탄압이 폭력적인 만큼 저항의 강도도 총격전으로 전개될 정도로 폭력적 양상을 띠었고 이에 따라 신군부의 대응도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등 폭력의 극치를 보였다.

    이렇게 국민과 군부 간의 대결이 무자비한 학살을 거치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승리한 전두환정부의 부당성은 그만큼 최악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광주항쟁 이후 한국정치에 있어 학생과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제기되는 전투성은 전두환정부의 부도덕성과 반인륜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단순한 반정부 민주화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반체제로까지 나아가는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5·17 쿠데타에 항의하는 학생 및 시민들의 저항이 왜 하필 광주에서 폭발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는 호남지역의 특수성이다. 광주로 대표되는 호남은 '지역의 계급화'가 논의될 정도로 권위주의적이었던 박정희정부의 편향적인 지역개발정책과 인사정책으로 인해 소외감과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그래서 광주는 민주주의를 통한 균형과 공정의 가능성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염원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둘째는 김대중이라는 요인이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등 대구–경북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호남 출신의 정치지도자이자 집권 유망주였던 김대중을 정부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였던 것이다.

    김대중 체포 등 신군부의 권력탈취에 이의를 제기하는 광주시민의 시위에 대해 신군부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상·진압으로 대응하자 반정부의 평화적 시위는 전투적이고 생사를 건 자구적 투쟁으로 바뀌어 나가게 된다. 전국이 계엄령 하에 놓여 있어서 언론이 통제되고 미국마저 애매한 태도로 방관하던 5월 18일 이후의 상황에서 뚜렷한 지도력이나 조직이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방어적인 '시민군'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부재한 가운데 자기보호를 위해 무장했던 광주 시민군은 5월 18일 공수부대 투입 이후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무력진압으로 이어지는 10일 간의 비극에서 철저히 희생되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는 마치 외국인 용병처럼 생명존중이라든가 관용과는 거리가 먼 태도로 학살에 임했다.

    광주항쟁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었다. 하지만 광주항쟁을 무참하게 억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군부의 폭력은 1980년대 새로운 사회변혁운동을 촉발시켰다. 1980년대 체제변혁운동이 보다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된 이유는 민주화운동이 실패하게 됨에 따른 허탈과 분노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향후 새로운 다짐과 강고한 투쟁방식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만약 1980년대 중반 이후 구소련 및 동구사회주의의 실패가 노정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의 한국경제가 1979~1980년의 경제위기를 해소하고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도모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사회변혁운동은 보다 더 폭력적이고 전복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 정도로 1980년 5월 광주항쟁과 그 비극적 희생은 한국 국민들을 환멸과 분노로 몰고갔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사회변혁의 혁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광주학살 이후 1980년대 말 한국과 국제사회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변화해나가면서 이러한 성과의 피드백으로서 온건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변혁과제를 제한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광주항쟁을 둘러싸고 그것이 정치적 민주항쟁이냐 계급적 민중항쟁이냐 또는 이 양자의 결합이냐의 논쟁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한 필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즉, 광주항쟁의 변혁지향에서는 1980년 광주항쟁 그 자체의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과 사회변혁적 요구사항 못지않게 그 이후에 전개되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역동성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독재 민주화의 의미가 가장 크게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광주항쟁은 '계엄철폐, 전두환 사임, 김대중 석방'을 둘러싼 국내정치세력 간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국군 제20사단의 광주투입을 둘러싸고 미국이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를 놓고 논쟁이 제기되면서 광주항쟁은 전통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인식해왔던 '미국이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 과정에서 반미운동이 태동하게 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군이 탄생하고 총격전이 제기되는 폭력적 대결과 관련하여 미국은 끝까지 배후에서 평화적 해결 방법을 모색했으며 제20사단의 광주투입을 승인한 것은 공수부대의 재투입으로 과잉진압이 예상되어 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 5월 20일 신군부가 20사단의 투입을 한미연합사에 요청했을 때 미국이 이에 동의했다는 것으로 인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이후 부산 미문화원 점거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2002년 12월 의정부 여중생추모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한미관계의 평등한 재정립을 요구하는 학생과 국민들의 요구가 꾸준히 지속되어 나가게 된 일차적 계기는 바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묵인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은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낳고 있었다. 따라서 12·12 쿠데타를 거치면서 신군부에 의한 재권위주의화가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1980년 서울의 봄의 민주화 열기는 국민들의 압도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치과정에서 자유경쟁 절차의 제도화와 함께 경제적 불공정과 사회적 소외를 줄여나가는 생존권의 보장 그리고 대외적 자율성과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을 포괄하는 실질적인 것을 의미할 때,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독재자 없는 독재체제'의 지속을 거부하고 민주주의의 정착을 의도했던 민주화운동이었다.

    더구나 1980년 시점에서 민주를 보류시킬 정도의 긴급한 과제로서 근대나 민족과 같은 역사적 가치가 널리 호응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순전히 신군부의 권력만을 추구한 잉여군사정부를 위해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어떤 이유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1980년 광주의 희생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의 한으로부터 원기를 받으면서 1987년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온건·안정적인 방식으로의 진전과 제도화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