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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4.14

조선시대 김만덕은 기생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거상이 될 수 있었던 건가요?

김만덕은 조선시대에 제주지역 출신, 여인에다가 기생출신인데요.

더군다나 관아 소속 기생이었다는데 어떻게 큰 부를 이룰 수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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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신분제가 엄격하게 적용되었지만

    임진왜란과 두번의 호란 이후 양반이 무능하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게 되면서

    신분제의 점진적인 붕괴가 일어나게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만덕은 12살 때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두 오빠는 목동이 되어 막일을 하며 외삼촌 집안에서 얹혀 살다가 은퇴한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았다고합니다. 이후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 쪽의 강요를 받고 그만두었다고합니다.

    다시 양인 신분으로 돌아온 뒤 객주 일을 시작했고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수완을 발휘해 제주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되었다고합니다. 조선시대 제주 여성의 몸으로 상업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고, 흉년으로 기근이 들자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아 많은 제주 백성을 구휼했으며 1796년 여성의 벼슬 중 가장 높은 내의원 의녀반수에 명해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만덕은 조선시대의 여인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후에 자신의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절망을 느꼈지만, 이후에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여 다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김만덕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은 그녀의 인내와 자기계발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모범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녀의 삶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데에 대한 영감을 줍니다. 또한, 김만덕은 한국사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인물로 강조됩니다.


    따라서, 김만덕의 삶은 우리에게 그녀의 인내와 자기계발, 도전정신과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며,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만덕은 재물을 모르는데 능하여 상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그녀는 배를 만들어 육지와 미곡을 무역했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이는 물가의 변동을 잘 파악해 적절한 시기 물건을 사고 팔았던 상인으로서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만덕 업적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사온 쌀을 모두 진휼미로 기부하여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는 의녀(義女) 김만덕으로 불린다

    본받을 점

    검소하게 생활하고, 남을 배려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김만덕의 가치관+ 평가

    "이익을 적게남기고 많이 팔자" 제주에 큰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었다. 뛰어난 기업가이자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자선사업가로도 오늘 우리가 충분히 만덕을 기릴만하다. 그러나 만덕을 오늘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엄중한 유교 규범이 여성을 옥죄고 있던 시기에 시대와 불화하지 않고 당시 여성에게 지워진 한계를 거침없이 뛰어 넘었던 용기를 만덕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기생으로 성공했으나 가족의 명성을 더럽힌다는 질책 때문에 기적에서 빠져 나왔고, 가족을 원망하지 않고 기근에 처한 가족을 구함으로써 가족과 화해하였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녀로 유교 사회에서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활발해진 해상을 이용한 유통업에 눈을 떠 여성기업인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던 창의적인 개척자였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향해술과 조선술로 해상교통이 크게 발달하자 김만덕은 객주를 포구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기존 객주에서는 숙식을 제공하던 단순한 일만 했지만, 포구에 차린 객주에서는 상인들 간의 상품을 위탁매매하는 중간상의 역할로 변모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그녀는 양인으로 신분이 회복한 후에도 평생 독신으로 전통사회의 정절 관념을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 안녕하세요. 김소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만덕의 생애와 더불어 김만덕이 거상이 된 이유를 알려드립니다.

    김만덕은 양인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12살 때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고 두 오빠는 목동이 되어 막일을 하며 외삼촌 집안에 얹혀 살았다 합니다. 이후 은퇴한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았고,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의 강요로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다시 양인 신분으로 돌아온 뒤, 객주 일을 시작했고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수완을 발휘해 제주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객주들의 시기심 때문에 부정축재로 허위 신고를 당해 투옥되었다가 지역 주민들의 상소로 풀려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1795년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면서 도내 농사에 큰 타격을 입혔던 때가 있었습니다. 본토에서 20,000 섬을 보내지만 가던 중 침몰했고, 이 때문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본토에서 쌀 500섬을 사와 제주도민의 구호에 써달라고 관가에 헌납한 일도 있습니다. 이 소식은 얼마 후 제주 전임 목사였던 유사모에 의해 조정에도 전해졌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제주목사를 통해 소원을 물으니 "한양에 1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김만덕을 불러 명예 관직인 의녀반수에 봉하고 직접 만났으며 금강산 유람을 하고 싶다는 청도 받아들였습니다.

    기생 출신 양인이 왕을 알현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고 이 때문에 당대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고 합니다. 채제공은 김만덕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을 집필했고 정약용 등의 실학자와 김정희 등의 문인들도 김만덕의 구휼 사업을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습니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뒤에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 했고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 양아들을 들여 키웠습니다. 1812년 제주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양아들의 기본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제주도의 빈민들에게 기부했다고 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