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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재규어24723.12.08

어떻게 38도선이 만들어 졌나요?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6.25전쟁 후 38도선을 만들어 분활되었잖아요~ 그런데 왜 꼭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했나요? 어떻게 38선이 만들어 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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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5년 8월 11일 일제 항복 직전 미국이 설정하고, 이후 소련이 받아들여 설정된 임시 경계선이었습니다.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를 38도선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 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안하였고, 미국 정부 안으로 확정되어 소련과 협의함에 따라 설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8선은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1일, 미국이 설정하고 이후 소련이 받아들이면서 설정된 분할통치선으로,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남과 북이 단독정부를 수립하며 비극의 선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딘 러스크는 당시 미국 전략사무국 소속 직원으로, 소련의 빠른 남진에 당황한 미국이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분주하던 상황에서, 한반도 지도를 놓고 고민하다 자로 책상 위를 두 번 내리친 후 연필을 들고 지도에 줄을 그어 38선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팔선은 일본 제국의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 광복을 맞이한 조선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북위 38도 위선을 기준으로 설정한 경계선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38선은 애초 순수한 군사목적에 따라 일시적 편의를 위해 책정되었으며 2차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했음을 미리 내다본 일본,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측 3개국 수뇌들은 1945년 2월 4~11일 얄타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소련은 대일참전을 약속, 이 협정에 한국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적절한 시기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협약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고

    - 어느 단일국가에 의한 한국의 군사점령은 당한 정치적 반응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니라 단일체로 취급하여 중앙집권제행정원칙에 입각한 군정청을 조직할 것 등의 내용이 논의됩니다.

    그러나 그 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전후의 한반돈은 미군과 소련군이 분담해 점령하기로 약정,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히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한국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 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됩니다.

    그후 소련측과 합의, 미, 소 양군의 군사분계선으로서 38선을 책정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북한간의 경계선인 38선은 애당초 순수한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시적 편의를 위하여 책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미리 내다본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측 3개국 수뇌들은 1945년 2월 4∼11일 얄타 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소련은 대일참전(對日參戰)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① 적절한 시기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협약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고, ② 어느 단일국가에 의한 한국의 군사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응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니라 단일체로 취급하여 중앙집권제행정원칙에 입각한 군정청(軍政廳)을 조직할 것 등의 내용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전후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분담하여 점령하기로 약정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히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였다.

    그후 소련측과 합의하여 미·소 양군의 군사분계선으로서 38선을 책정하였다. 그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난 것은 1945년 9월 2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시 제1호였다. 여기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있는 일본군은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그리고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합중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시하였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세 한국이 차치능력을 가질 때까지 38도선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신탁통치를 시행할 것을 결정합니다. 명목상으로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서라는 것을 내세웠으나 이는 한국의 자치권을 빼앗아 간 행위로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나 북한이 찬탁으로 돌아서고 남한에서도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갈등을 겪게 됩니다. 좌우익으로 나뉘어 극단적인 대립을 하게 되었고 그 잔영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