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은 1910년 국치 이후 간도를 중심으로 한 남북만주와 노령 연해주 등지의 국외 한인사회에서 경주한 ‘독립전쟁론’의 결실이었다. 국치 후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은 일제로부터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국외 각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독립전쟁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독립을 향한 굳은 신념과 처절한 노력이 3·1운동을 계기로 봉오동승첩과 청산리대첩 등 독립전쟁으로 일시에 표출된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3·1운동에서 보여준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계승해 일제 침략세력으로부터 한민족이 독립할 수 있다는 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쾌거이기도 하다.
항일무장독립운동사상 공전의 대승을 기록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이 거둔 구체적 전과를 파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호 적대관계에 있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투 현지였던 중국측의 자료마다 각기 그 내용이 달리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전과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측이 절대적으로 압승한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