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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파리매77
활달한파리매7723.02.03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생긴 역사적 배경 및 이유 무엇인가요?

어릴적 암행어사 출도요와 함께 나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던 이야기들을 보곤 했는데 이러한 암행어사도 처음 생기게된 배경및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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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암행어사는 각종 어사 중의 하나로

    다른 어사와는 달리 임명과 임무가

    일체 비밀인 것이 특징이다.

    성종 때 지방 수령의 비리가 크게

    문제가 되면서 성립했는데, 조선 후기

    삼정문란이 심해지면서 더욱 활발히

    시행되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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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에, 임금 특명을 받아 지방관의 치적과 비위를 탐문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서 개선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입니다.

    조선 초기 적바림에 密遣(밀견)·潛行體察(잠행체찰)·暗行糾察(암행규찰) 같은 기사가 보여 이것이 암행어사의 전신인 것으로 보이나, 이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4월 암행어사를 각 道(도)에 보내다”라고 기록된 1509년(중종 4) ≪중종실록≫임. 선조 때까지는 암행어사에 대한 비판이 강하여 별로 파견하지 못하다가, 인조 때부터 점차 제도로 되었음. 국왕이 직접 臺諫(대간)·玉堂(옥당) 같은 젊은 朝臣(조신)을 임명하여 封書(봉서)·事目(사목) 한 권, 馬牌(마패) 한 개, 鍮尺(유척) 두 개를 수여하였는데, 숭례문을 나서야 뜯어보게 되었던 봉서에는 누구를 무슨 도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신분 표시와 임무 내용이 적혀 있었음. 사목은 암행어사 직무를 규정한 책이고, 마패는 驛馬(역마)와 驛卒(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증명이며, 유척은 檢屍(검시)를 할 때 쓰는 녹쇠 자[尺]임. 이들이 행차할 때는 선문(先文: 지방에 출장할 때 관리의 도착날을 그 외방에 미리 통지한 공문)을 사용하지 않고 미복으로 암행하여 수령의 행적과 백성의 억울한 사정 따위 민정을 자세히 살펴, 필요한 경우에는 출도하여 그 신분을 밝혔음. 非違(비위)·貪汚(탐오) 따위 수령의 잘못이 밝혀지면 그 죄질에 따라 관인을 빼앗고 봉고파직하여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임시로 刑獄(형옥)을 심리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음. 임무가 끝나면 書啓(서계)에 수령 행적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別單(별단)에 자신이 보고 들은 민정과 효자·열녀 같은 미담을 적어 국왕에게 바쳐 외방행정 개선을 촉구하였음. 1892년(고종 29) 李冕相(이면상)을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한 것을 끝으로 폐지되었음

    [네이버 지식백과] 암행어사 [暗行御史]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2. 15., 조기형, 이상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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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암행어사는 정상적 감찰이 작동하지 않을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사헌부가 관리의 부정 부패를 규찰하는 역할입니다. 하지만 지방행정에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팔도의 관찰사가 왐을 대신해 그러한 역할을 해야하지만, 한명의 관찰사가 맡는 지역과 인구수가 대단히 큽니다. 이럴 때 상소가 올라오거나 지방에 문제가 없더라도 암행감찰을 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암행감찰을 하고 있으니 그 효과는 입증된 것이지만, 상시적인 감찰이나 행정의 투명성이 우선입니다. 암행어사는 왕의 신임을 받는 이로 뽑아 왕명을 받아 역할을 특정해 수행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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