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석가가 세상을 떠나고 100여 년이 지나자 교단 내에서는 교리와 계율의 해석 문제를 놓고 논쟁이
일었고, 이에 따라 과거의 계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과 시대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의 두 입장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단의 관심은 온통 석가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교리의 해석이었으며, 자연히 출가자와 승원(僧院)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불교의 성격을 띠어갔습니다. 따라서 출가를 전제로 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고, 또 타인의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의 완성을 우선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단으로부터 멀어진 대중들은 교단에 반발하며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석가에게로 복귀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로써 대승불교가 탄생하였습니다. 이들은 개인보다는 전체의 완성을
우선한다는 입장에서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칭하고, 이에 반해 기존의 부파불교를 '소승(小乘)'
이라 낮추어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