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친명배금 정책과 정묘호란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서요.

명나라와 친밀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후금배금정책이라고 하던데요. 궁금한게 친명배금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그리하여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했음을 해명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설진(設鎭)해 요동 수복을 꾀하는 거북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별다른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인당 중심의 광해군 때는 중립외교를 했습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주었고,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금과 조선 사이엔 큰 갈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발생합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 세력이 중심이 되었고, 이들은 친명배금 정책을 펼칩니다. 후금 입장에선 신경이 거슬리게 됐습니다. 이때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난을 함께 일으킨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면서 정묘호란의 명분이 됐습니다.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조선을 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한, 청나라가 1차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끼게 된 것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고, 전 국토가 황폐화됐습니다. 조선은 건국 시부터 명나라를 섬기며 사대의 예를 다한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다가 명나라의 세력이 약해지고 오랑캐라 여겼던 청나라 부흥하게 됐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에게 고개를 숙일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사대의 예를 저버릴 수 없다며 청을 무시합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