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쇼다 사건 당시 프랑스가 양보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아프리카를 두고
종단정책, 횡단정책을 하며
파쇼다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부딪혔는데
당시 어느정도 냉전이 있은 후 프랑스에서 양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 파쇼다에 깃발을 먼저 꽂은 것 프랑스인데
어떤 이유로 프랑스가 먼저 물러서게 된 것인가요?
파쇼다사건의 결말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는 영국의 우세를 인정해 11월 3일 마르샹의 원정대에게 철수를 지시하면서 쉽게 해결, 다음해 1899년 3월 나일강과 콩고강의 수원 중간 지점을 경계로 하자는 내용에 양국이 동의합니다.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상실된 데는 단기적인 원인과 장기적인 원인이 있는데 단기적으로는 1898년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점으로 파나마 운하 비리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다수의 내각이 몇개월 버티지 못하고 단명했으며 이 때문에 4년간 재임했던 아노토장관은 7월 말 사임, 뒤를 이은 앙리 브뤼송 내각의 테로필 델카세장관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탈리아왕국의 삼국동맹을 극히 경계하고 있어 영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는 건 지극히 무익하다고 보았습니다.
애당초 당시 파쇼다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열세일수 밖에 없던 것이 프랑스군은 영국군을 만나 대립하게 되자 개전 여부를 상대편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영국군이 카이로로 전령을 보내 카이로에서 런던으로 가설되어 있던 해저전신을 통해 런던에 소식을 전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소식을 전하고 파리로부터 다시 그 과정을 역으로 거쳐 현지의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명령전달이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모든 정보를 알고있던 영국은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프랑스 본국으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장기적 원인으로는 친영국 입장의 델카세가 이례적으로 7년동안 장기 재임, 프랑스가 횡단정책을 재개할수 없는 환경이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노리던 에티오피아는 메넬리크 2세가 내륙으로 진출하려던 이탈리아를 격퇴했던 상황으로 자신만만하던 메넬리크 2세는 1902년 철도 건설을 구실로 에티오피아에 손을 써보려던 프랑스의 계획을 파악해 철도 건설을 중단하는 것이 결정타가 되며 1899년 초에 마흐디 신국은 영국에 의해 완전한 진압 단계에 있었습니다. 결국 프랑스 중앙정부 입장에서 기존에 장악하려던 횡단선을 계속 추구할 이유가 점점 사라진 것, 또 군사적 측면에서 원정군을 파견할 수 있는 해군 함대가 프랑스 측이 영국에 열세한 사실도 한몫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