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rogermaan
rogermaan23.06.11

친일매국노 유명한 이완용이 처음에는 애국자였던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인가요

이완용이라고 하면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하는 친일파 매국노 인데요 . 이완용도 처음에는 애국 자였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것이 진실인가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도 처음에는 조선의 엘리트 관료였기 때문에 애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매국노는 아니였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친일매국노라고불리는 이완용은 처음에는 애국자가 맞습니다.

    이완용은 수구파의 일원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해진다고 판단한 그는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배우고, 한국 최초의 주미 공사단의 일원으로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개화파가 되었습니다. 이시기 이완용은 대미외교의 1인자이자 친미파로 널리 알려졌고, 이후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모임에 가담하여 정동파수장으로 친일, 친청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은 반일을 외치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존속 기간의 2/3이상을 이끌었는데 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하며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도 매번 이완용을 칭송했는데 독립문 정초식 행사 때 그의 연설이 독립신문에 남아있습니다.

    이완용은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지만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운다면 유럽의 폴란드 같은 나라가 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애국자란 의미가 조선이 세계열강에 휘둘리지 않는 그런 위치에 있게 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이완용의 전반부의 삶은 애국자가 맞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바뀌게되고 그 결과 처음에는 애국자가 매국노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1919년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던 육당 최남선도 나중에 변절하여 일본을 위해서 일 했습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했던 이완용은 처음에는 수구파의 일원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해진다고 판단한 그는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배우고, 한국 최초의 주미 공사단의 일원으로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고 개화파가 되었습니다. 이시기 이완용은 대미외교의 1인자이자 친미파로 널리 알려졌고, 이후 주미공사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모임에 가담하여 정동파(貞洞派) 수장으로 친일, 친청세력을 견제하였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친일내각의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다 미국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이자 이범진 등 친러파와 공모하여 1896년(건양 1년) 고종황제를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896년 7월부터 1898년 초반까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면서 위원장, 부회장 및 회장직을 맡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신정치운동을 표방하는 데 앞장섰고, 고종의 환궁운동을 전개하여 실현시켰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고 독립협회가 이를 반대하면서 이완용은 이를 중재하려 하였지만 양쪽 모두에게 배척되었고, 친러 세력의 압력으로 1897년 9월 평남 관찰사로 임명되며 외직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1898년 2월 독립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나, 3월에 전북 관찰사가 되면서 실제활동을 중지하고, 7월17일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독립협회에서 제명 처분되면서 협회를 떠났습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고, 고종황제를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 하였지만,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면서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일본에 진 것과 미국의 거부가 일본의 강력한 힘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죠. 사실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선과 필리핀에 대한 각각의 지배권을 인정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솔선하여 지지하고 서명함으로서 을사5적신(乙巳五賊臣)의 한명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때의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되었습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자, 헤이그 밀약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가 순종황제에게 황위를 강제로 양위하도록 주도하는 등 한국사에서 결고 지워지지 않을 매국활동을 계속해서 진행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