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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8.11

조선말에 김가진 같은 서자가 고위대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시대에는 첩의 자식이라는 소리도 면전에서 할 정도로 서얼의 차별이 있었고 그들은 관직에도 등용되지못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고종이 김가진같은 서자도 고위대신으로 임명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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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는 서얼이었으므로 과거 응시가 불가능했기때무에 1877년 서얼들에게 허용된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신설되자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41세되던 1886년 정시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 ,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나 같은해 청나라 배격을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 적발되어 위안스카이의 압력을 받아 전라도 남원도호부로 유배되었습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톈진에 잠시 파견되었다가 1887년 주일공사관이 개설되자 그를 눈여겨 본 고종의 특별한 낙점을 받아 초대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일본행에 올랐으며 초대 공사 민영준이 국서만 일본에 전달하고 귀국하자 뒤이어 주일공사가 된 김가진은 공사관 개설부터 모든 외교 업무를 직접 처리해 사실상 최초의 재외공관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신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 되었습니다. 고종 자신이 신분제 폐지를 허락 하고 서얼을 차별 한다면 이치상 맞지 않는 것이고 대한 제국에서는 더이상 신분을 따지지 않으려고 노력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시험을 통해 공직에 입문하는 관리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직 입문을 위해서는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과거평시(과거병신, 제자를 둔 사람의 아버지) 또는 서과(제자를 둔 사람)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가 고위대신(태사관, 관리의 차장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김가진과 같은 서자들이 고위대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주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학문적 역량: 조선 사회에서는 학문적인 능력과 지식이 공직에 입문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서자들은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학문적 지식을 쌓아서 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학문적 역량이 고위대신으로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2. 네트워크와 지원: 서자들은 그들의 스승으로부터 네트워크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자-선생 관계는 상호적인 관계이며, 스승은 자신의 서자가 공직에 승진하고 성공하도록 돕는데 관심을 두곤 했습니다.

    3. 시험 결과: 서자들이 학문적 지식과 능력을 발휘하여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면, 그들이 승진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조선의 관료제도는 시험의 결과에 따라 공직에 입문하고 승진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4.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 일부 서자들은 그들의 가문이나 스승의 영향력을 빌려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향력을 통해 고위대신으로 승진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조선 시대의 관료제도는 학문적 역량과 지원, 시험 결과, 네트워크 및 정치적 영향력 등 다양한 요소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한 서자들 중에서 일부가 고위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