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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페퍼민트23.07.29

한국사에서 도서관은 언제 등장했나요?

사극을 보다보면 한 권의 책을 여러권으로 필사해서 마치 오늘 날의 도서관처럼 대여해주기도 하던데, 이러한 도서관이 어느 시대부터 등장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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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은 고구려의 경당이라고 합니다. 고구려의 민간 교육기관이었다고 합니다.

    사설학숙기관이었던 경당은 서적을 수집해 여러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일종의 도서관 구실을 했습니다.

    평민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경전을 읽고 궁술을 익혔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수서원이 도서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보제사 부속건물인 2층의 장견전에 당대 1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있었는데 당대 지식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혜가 보제사에 모여있다 라고 기록했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습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도서관입니다.


  •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은 고구려의 경당(經堂)입니다. 사설학숙기관이었던 경당은 서적을 수집해 여러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일종의 도서관 구실을 했구요, 평민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경전을 읽고 궁술을 익혔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수서원(修書院)이 도서관 역할을 했었구요, 990년(성종 9)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에 세운 수서원은 지방 최초의 도서관이었습니다. 궁궐 밖에 설립돼 서적의 수집, 보존, 정리 및 활용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고, 이외에도 고문서나 전적을 참고로 하던 왕실문고, 불교의 경적(經籍)을 갖춘 사원문고, 교육기관에 설치됐던 교육문고 등은 초기 도서관 기능을 했다고 합니다.

    관영문고(官營文庫)와 사설문고 등 각종 문고도 마찬가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의 집현전(集賢殿)이나 정조 때의 규장각(奎章閣)을 비롯해 많은 왕실도서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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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고대사는 늘 자료의 부족이란 문제를 안고 있다. 고대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거나, 도서관의 전통이 없었던 탓일까? 이에 대해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 25권에 실린 “기년아람(紀年兒覽)”서문에서 이만운(李萬運:1723〜1797)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나라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동방의 모든 서적을 평양에다 모아놓고 우리나라의 문물(文物)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모두 불태워버렸으며, 신라 말엽에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을 점령하고는 삼국의 모든 서적을 실어다 놓았었는데, 그가 패망하게 되자 모두 불타 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3천년 동안 두 번의 큰 재앙이다.”

    황현(黃玹, 1855~1910) 또한 1908년에 쓴 [매천야록]에서 “당나라 이적(李勛)이 평양을 점령한 후 고구려의 장문고(藏文庫)를 보고, ‘고구려가 문헌을 이렇게 많이 구비하고 있을까? 이 서적을 그대로 놔두면 후세 사람들에게 지혜를 발전하게 하여 변방의 우환만 가중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서적을 모두 소각하였다. ”는 글을 남겼다.


    이규경(李圭景 , 1788〜1856)이 편찬한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전적잡설(典籍雜說)”에도 우리나라 서적의 수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규경은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어찌 중국에만 있었겠느냐면서, 책이란 고금의 큰 보배이지만 때로는 조물주의 시기를 받아 항상 재난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책의 수난이 있었는데, 대강만 헤아려도 열 가지가 된다고 하면서 다음의 것들을 꼽았다.


    당나라 이적이 고구려의 책을 평양에서 모아 놓은 다음 고구려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모두 불태운 것, 견훤이 망할 때 삼국시대 책을 옮겨놓았던 것이 불타 없어진 것, 고려 시대 전쟁에서 불탄 것, 명종 때의 경복궁 화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 백성들이 책을 뜯어 다시 종이를 만들거나 벽지로 사용한 것, 책을 지나치게 감추어 둔 것 등이 책이 사라진 원인이라고 하였다.

    앞서 언급한 황현의 말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장문고’라는 도서관에 많은 책들을 보관되어 있었으나 고구려의 발전을 염려한 당나라의 만행 때문에 귀중한 기록들이 사라진 것이 된다. 하지만 장문고는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으로는 고구려 경당이 유력하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여, 가난해서 천한 일에 종사하는 집에서까지 각기 네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고 부르며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밤낮으로 그 곳에서 독서를 하거나 또는 활쏘기를 배운다. 책은 유교경전인 [오경(五經)] 및 [사기] · [삼국지], 어학서인 [옥편], 문학서인 [문선(文選)]등이 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경당은 교육기관인 동시에 도서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도 사람들은 문서를 기록하고, 책을 만들었다. 서기 251년 신라의 12대 왕 첨해이사금은 부도(夫道)란 자가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고, 글(書)과 계산(算)을 잘하여 이름이 난 지라, 그를 불러 아찬을 삼고 물장고(物藏庫-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의 사무를 맡긴 바 있다.


    357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안악3호분 고분벽화에는 주인공 곁에서 기록을 하는 관리의 모습이 보인다. 이와 같은 자료들은 삼국시대 초기에 문서로 기록을 남기는 행정이 이루어졌고, 그 기록을 관리하는 자들이 존재했음을 추정하게 해준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기록은 그 양이나 체계성의 측면에서 조선시대와 비교했을 때 걸음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출처 : 한국의 생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