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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내일도모레도
오늘도내일도모레도23.07.23

서얼은 능력이 있어도 과거에 등용될 수 없었나요?

조선시대에 서얼은 양반도 중인도 아닌 애매한 지위를 지니고있었는데 적서의 차별은 당연시하던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과거에서도 능력이 있어도 제약이 있었을 것 같은데 서얼은 과거 자체를 볼 수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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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등용의 어려움을 인식한 관리들에 의해 서얼통청론이 중종 때에 조광조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조선 중기를 거쳐 선조 때에는 서얼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음관으로 지방의 수령 등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왜란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임시적으로 납속을 통한 통청이 행해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정조는 서얼금고법이라고 하여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의 서얼들을 대거 등용하고 서얼들이 부사와 향임직에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하였으며, 서류소통절목을 전국에 반포하여 신분차별을 타파하려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도 불합리함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서얼은 문과나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해 양반관료의 등용시험인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얼은 대과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관직에 오르더라도 5품 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한품서용이라는 제약이 있었지요. 대과는 문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수도 한양에서 마지막 시험이 치러지는 과거의 꽃이었습니다. 따라서 서얼은 고위관직이 될 수 없었고 양반 밑에 중인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는 사례가 많았고 이에 정조는 서얼을 등용해 규장각 등에서 활약하도록 길을 터주었습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