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고려 건국 이후 후삼국을 통일하기위해 후백제와 전쟁을 벌이고 신라을 의식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왕건이 가장 필요로 한 것은 각 지방에서 독립 세력으로 존재하던 호족들의 지원이었기에 각 지방의 유력 호족과 가장 강력한 동맹을 맺는 방법이 혼이이었기때문입니다. 왕과의 혼인은 정치적 행위를 의미하며 호족들 입장에서도 자신의 딸을 왕건과 혼인시킨다는 것은 훗날 최고의 권력을 차지할 수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고 왕건의 혼인이 단순한 개인사가 아닌 일종의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건은 호족을 포섭하여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호족 융합 정책을 추진했는데, 결혼 정책과 사성정책이 그 것입니다. 결혼 정책은 유력 호족의 딸들과 정략 결혼을 통해 호족들과의 유대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왕건은 29명의 부인과 결혼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건은 나라가 세워지자 논공행상을 통해 공신들에게 그 공을 치하하였는데 혼인 정책 그 과정에서 유력한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하는 혼인 정책을 시행하면서 왕권을 강화 합니다. 즉,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략 결혼을 한 것인데 따라서 왕건에게는 무려29명이나 되는 부인이 존재하고 자식이 34명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