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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3.05

신라 골품제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신라 골품제는 신분제도 라고 들었는데 어떠한기준으로 신분제를 나눴는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궁금합니다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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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0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골품제도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한 두품제로 구분되며

    골품제는 이를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성골: 골족 중에서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을 말합니다.

    원래는 진골만 존재하였는데,진흥왕의 태자인, 동륜계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골은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을 하였고, 결국 멸종하게 됩니다.

    선덕여왕도 성골 남자가 없어서 왕이 되었죠.

    진골: 골족으로서 진골 역시 왕족입니다.

    신라의 지배계층의 핵심을 담당하였습니다.

    6두품: 두품수가 높을 수록 상위 신분입니다.

    이 신분 역시 경위에 진출할 수 있는 상위 신분입니다.

    이 가운데 6두품은 진골에 비해 신분상승에 특히 제한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으로 불릴정도로 귀성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6두품도 엄청난 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5두품~4두품: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국가의 잡다한 실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신분은 정해진 게 아니라서, 진골의 경우에도 강등되어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골품제는 신라에만 있는 신분체계로서, 초기에는 신라 중앙집권체계의 큰 역할을 했지만, 후대에 와서는 그 신분의 폐쇄성 때문에, 하위계층에서 많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또한 상위 계층인 진골의 부패와 폐단등, 나라의 망국적인 형태가 일어나자, 신분에 불만을 가진 6두품들은 지방의 호족들과 결탁하여, 후삼국시대를 열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신분제로 인한 폐쇄성과 고위층의 부패로 인해 신라가 망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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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신라의 골품제는 특정신분만이 부와 권력을 가질수 있었다. 즉 금수저만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

    골품제는 연맹국가가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난립해있던 세력을 새로운 국가질서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된 제도입니다.

    골품제는 사회 통합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지방 부족장을 견제하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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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골품제의 특이한 점은 신라에 여왕이 존재할 수 있었던 특이점의 원인 중 하나인데 골품이 성별보다 중요해서 성골여성이 진골남성보다 왕위계승순위가 높았다는 것입니다.이런 사회 분위기라 모계혈통이 더 신분이 높거나 가문의 힘이 더 쎄면 모계쪽 혈통으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성골출신만이 왕위계승을 하였씀으로 혈족간 결혼을 하게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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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신라시대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구분한 제도이며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귀족과 일반백성을 두품제(頭品制)로 구분하였습니다. 관직 진출, 혼인, 의복·가옥·수레 등의 규모와 장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엄격하게 규제하였습니다.

    신라 국가 형성기 이래의 정치체제 및 사회발전 과정에서 형성되어,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장기간 존속하였으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왕족과 일반백성을 구분하는 제도로 유지되었다.

    골품제도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여타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로 구분되며 이를 합쳐부르는 말이다. 원래 신라는 경주에 자리잡은 사로국(斯盧國)의 6부(部)를 중심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성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복속된 소국의 지배층 가운데 일부를 경주로 이주시켜 지배층인 6부에 편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원거주지의 촌주(村主)로 삼아 복속지역 통치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6부체제를 특징짓는 이같은 신라 초기의 정치체제는, 지증왕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6세기 초반에 해체되었다. 520년(법흥왕 7)의 율령(律令)반포는 6부체제가 해체된 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인 관료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율령을 반포할 때 원래의 신라인과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온 지배층에 적용한 신분제가 골품제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등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신라의 관등제는 경위(京位)와 외위(外位)의 이원적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골품제의 적용을 받은 경주인들은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경위를 지급받았다. 반면에 지방인들은 골품제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채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위만을 받았다.

    골품제는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골족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구분되었으며, 두품층은 6두품에서 1두품까지 있었는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그러나 이 가운데 3두품에서 1두품까지는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율령 반포 초기에 일반 평민을 3등분하였다가 현실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자 곧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성골은 골족 가운데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이었다. 진골 역시 왕족으로서 신라 지배계층의 핵심을 이루면서 모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골과 진골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성골과 진골 모두 왕족 출신으로 원래는 진골만 존재하였다. 그러던 것이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계의 후손들이 자신들을 다른 진골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골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동륜의 손녀이자 진평왕(26대)의 장녀인 선덕여왕(27대)이 여자로서 왕위에 오를 때, 왕위계승의 근거를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골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29대) 김춘추는 진지왕(25대)의 손자였다. 그리고 김춘추의 아버지이자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龍樹)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생존해 있었다. 똑같이 진흥왕의 후손인 용수와 선덕 중 선덕만이 성골이었다는 점은, 용수와 구별되는 선덕여왕 계열에서 동륜을 시발점으로 하여 다른 가계와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계를 신성화시킨 결과인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에서의 진종설(眞種說)과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은 이같은 성골의식이 대두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였다.

    진골 아래의 6두품에서 4두품까지의 신분층 역시 경위에 진출을 할 수 있는 상급 신분층이었다. 이 가운데 6두품은 진골에 비해 관직 진출 및 신분상의 제약이 다소 강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득난(得難)'으로 불릴 정도로 귀성(貴姓)이었다.

    5두품과 4두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으나, 국가기관의 잡다한 실무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에 따른 신분 등급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진골의 신분이었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한 등급 강등되어[族降一等] 6두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선을 규정한 것이다. 신라 17개 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伊伐飡)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大阿飡)까지는 진골만이 할 수 있었고, 다른 신분층은 대아찬 이상의 관등에 올라갈 수 없었다. 신분에 따른 관직 임명시 제기되는 하급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상한 관등에 몇 개의 관등을 더 세분해서 두는 중위제(重位制)가 실시되었으나 골품제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골품제도 [骨品制度]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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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골품은 뼈[골(骨)]의 등급[품(品)],

    곧 타고나는 신분을 뜻한다. 골품제(骨品制)는 신라 지배층, 곧 귀족을

    등급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이다.


    성골(聖骨), 진골(眞骨), 6두품(六頭品), 5두품, 4두품의 다섯 등급이 있었다.

    그 아래로 3⋅2⋅1두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 등급은 점차

    일반 백성과 구분이 없어지면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또 성골의 경우 진덕 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따라서 통일 신라 시대에는

    4개 등급만 존재하였다.

    -출처: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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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골품제는 뼈[골(骨)]의 등급[품(品)], 곧 타고나는 신분을 뜻합니다.

    골품제(骨品制)는 신라 지배층, 곧 귀족을 등급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이다. 성골(聖骨), 진골(眞骨), 6두품(六頭品), 5두품, 4두품의 다섯 등급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이하로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뿐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국가형성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6세기 초는 이미 법제화되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신라사회를 규제하는 중요한 근본으로서 기능, 작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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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귀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제도는 골품, 즉 개인의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졌던 제도입니다.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비교되고 있기도 합니다.


    답변이 도움 되었다면 추천/좋아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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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신라 골품제는 신라라는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며, 사실상 이 골품(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 )이 그 사람의 삶 모든 것을 결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 이벌찬 ~ 대아찬까지 고위 관직도 성골, 진골만 오를 수 있었구요. ]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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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골품제는 연맹국가가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난립해있던 세력을 새로운 국가질서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된 제도입니다.



    기존의 중소세력들을 규모와 영향력에 따라 나누어 성골(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등의 새로운 신분계급에 포함시키고 그에 따라 관직과 땅을 나누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중앙정부에 편입시켰고, 동시에 골품과 연계된 관직운영을 통해 골품에 따라 특정 직위 이상으로 승진못하게 하여 중앙의 영향력이 약한 지방의 중소 세력들이 지나치게 성장하여 기존의 권력세력을 침식하는 것을 방지, 견제하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습니다.



    때문에 골품제는 사회 통합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지방 부족장을 견제하는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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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골품제는 신라 지배층을 등급으로 구분하는 신분 제도였습니다.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의 다섯 등급이 존재하였습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며, 왕족이 아닌 신분은 진골에서 6까지의 두품으로 나뉘었습니다. 그 아래로 3⋅2⋅1두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 등급은 점차 일반 백성과 구분이 없어지면서 소멸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골의 경우 진덕 여왕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통일 신라 시대에는 성골을 제외한 4개 등급만 존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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