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감천문화마을에 유래 및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오늘은 감천 문화 마을 축제로 왔는데 많은 외국분들을 비럿해 많은 분들이 참석하고 있는 상황인데 문극 이런 감천 문화마을의 형성에 대해 역사 및 유래는 어찌 되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감천문화마을은 1950년대 6.25 피난민의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일본식 가옥을 짓기위해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한중이 일본에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건축한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유한중은 국외에 숨어 있던 유관순 열사를 부산 감천동에 불러내어 가옥을 건축하였고 전쟁 후에는 난민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합니다. 이곳은 계단식 집단 주거형태와 모든 길이 통하는 미로같은 골목길의 경관은 감천만의 독특함 낙후된 달동네였지만 문화예술을 가미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지금은 연간 185만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다녀가는 대표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자연과 어우러진 그림같은 마을의 풍경을 즐길수있고 골목골목 설치된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감상할 수도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과 태극도의 신도들이 이곳에 정착해 맨 땅에 주민 스스로 집을 짓고 소규모 마을을 이뤘고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부산의 평지들이 시가지로 가득 차 어쩔수 없이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던 산비탈까지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가까운 구평동 산업단지의 조선소와 공장의 노동 인구 대부분을 공급했으나 마을이 생성된 배경의 태생적 한계로 교통과 일상생활이 불편한 위치인데가 인근 구평 산업단지가 몰락하고 주거지가 낙후해 다대동, 하단동, 괴정동 등 신흥 주거지구로 인구가 많이 빠지게 됩니다.
197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인구가 감소, 인구가 너무 가파르게 줄어들어 2007년 즈음 텅 빈 마을을 살리기 위해 재개발이 논의, 실제 추진까지 되나 거주민을 모두 수용할 만한 대규모 재개발 추진은 어려웠고 당시 불었던 뉴타운 사업에 대한 반발 여론과 함께 원주민들의 반대에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이후 기존 건물을 다 밀고, 새 건물을 짓는 기존 재개발 방식을 포기하는 대신 소위 보존형 재개발로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게 됩니다.
감천문화마을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게 되자 이곳의 특이한 지형구조로 생긴 괜찮은 경치와 분위기가 여러 입소문을 타고 감천 2동이 점차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감천문화마을은 1950년데 피난민들과 태극도 교도들 4000명이 집단 거주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계단식으로 들어선 파스텔톤의 집들과 미로 같은 골목길, 골목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형태의 조형 작품과 알록달록한 벽화 등이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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