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채 보상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습니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습니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습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습니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國債報償金消費事件)’을 조작한 것입니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습니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