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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드림
아름드림23.06.27

유럽에서 일어났던 백년전쟁의 내용과 주요 인물은 누가 있는지요?

역사시간에 배웠던 내용 중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백년전쟁이 있는데요

해당 전쟁의 대략적인 내용과 전쟁의 판도를 갈랐던 주요 인물은 누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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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윌리엄 1세가 영국을 정복하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고

    잉글랜드 국왕에 올랐고 그 대를 이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윌리엄 1세가 노르망디 공작출신으로

    프랑스 왕의 봉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자기네 신하가 왕에 올랐고

    그의 후손이니까 잉글랜드를 자신의 신하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게 백년전쟁의 원인들 중 하나입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주도해서 잔다르크를 죄인으로

    몰았고 중세교회에서 화형을 집행했습니다

    다만 모든 잉글랜드인들이 잔다르크를 죄인으로 몬 건 아니고 화형을 보던 잉글랜드 병사, 헨리 6세의 비서까지 대다수가 탄식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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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년전쟁은 1337년~1453년으로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영국군이 침입하였으며 초기 영국이 우세했으나 잔다르크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승리해 영국으로부터 프랑스 영토를 회복했고, 귀족이 몰락하고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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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은 오랜 방어와 느린 공격, 휴전과 화해 등을 겪으며 백 년을 넘게 이어졌다. 물론 그동안 전쟁은 잉글랜드의 주도권 아래 이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지 100년이 가까워진 1429년 잔다르크라는 영웅이 프랑스 국민을 결집시키면서 갑자기 반전한다.


    요즘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길어야 1, 2년 내에 결판이 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첨단 전자 장비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감출 수 없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깊은 곳에 위치한 기지라고 하더라도 폭격의 칼날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오직 손에 든 칼과 창, 화살로 싸우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높고 견고하게 쌓은 성은 웬만한 장비로는 정복할 수 없었고, 전장을 벗어나면 숨어 있을 숲이 곳곳에 있었다. 그뿐인가? 적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었다. 따라서 전쟁이 벌어지면 승부를 가르는 데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던 전쟁이 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백년전쟁’이다. 사실은 100년 이상이 걸렸지만 후손들이 기억하기 쉽게 이렇게 부른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1328년 프랑스의 왕 샤를 4세가 서거하자 프랑스 남서부의 기옌 공작을 겸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자신이 프랑스 땅의 공작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이 샤를 4세의 누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샤를 4세에게는 아들도 없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노릇이지만 중세 유럽에는 그랬다. 한 왕이 자신의 나라 밖에서 작위를 받으면 다른 왕의 봉신(封臣), 즉 봉토를 받는 신하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를 방관할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프랑스 왕을 지낸 필리프 3세의 손자인 발루아 백작은 자신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했고, 프랑스 의회는 발루아 백작을 필리프 6세라고 칭하고 왕위 계승을 결정했다. 에드워드 3세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본래 없던 것이니 없던 걸로 해도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사실 필리프 6세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즉위를 모든 프랑스인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필리프 6세가 즉위를 선언할 무렵 에드워드 3세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그 무렵 임신 중이던 샤를 4세의 미망인이 출산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다행히도 딸이 태어나자 겨우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왕위에 오른 필리프 6세의 앞날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결국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 끝에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갖고 있던 프랑스 영지를 몰수하게 되었고, 이에 격분한 에드워드 3세도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왕위를 요구함과 동시에 플랑드르 지방에 영국군을 파견했고, 이로써 100년이 넘는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전쟁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오랜 방어와 느린 공격, 휴전과 화해 등을 겪으며 백 년을 넘게 이어졌다. 물론 그동안 전쟁은 그 무렵 강력한 국가인 잉글랜드의 주도권 아래 이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지 100년이 가까워진 1429년 잔다르크라는 영웅이 프랑스 국민을 결집시키면서 갑자기 반전한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인들에게는 민족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낌새를 눈치 챈 필리프 공작(브르고뉴 공작 장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내전에 휩싸여 암살당했다)은 잉글랜드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이때부터 전쟁의 주도권은 프랑스에게 넘어왔고,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장미전쟁을 틈타 노르망디를 정복한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의 프랑스 내 봉토인 아키텐까지 정복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인 1453년 백년전쟁은 역사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에도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에 칼레를 거점으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땅은 1558년 마지막으로 프랑스 손에 넘어가게 된다.


    백년전쟁을 기점으로 프랑스인들은 유럽 대륙의 독자적 국가로서 인식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갖게 되는 반면 잉글랜드, 즉 영국인들은 유럽 대륙의 정치에 관여하려는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100년 넘게 치른 수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배운 교훈 치고는 좀 약한 듯하지만 말이다.

    출처 : 세상의 모든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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