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 마지막 황제가 황제자리를 박차고 만주국으로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청의 마지막 황제로 북양정부에의해 자신에 한 해서 황제자리를 보장받았었던 푸이가 결국 자금성에서 쫒겨나긴했지만 다시 장제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만주로 간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淸)은 중국 역사상 만주족(滿族)이 통치한 최초의 왕조로서, 1644년에 세워져 1912년에 무너지기까지 약 268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청의 마지막 황제는 족보상으로는 쉰지(愼智)이며, 연호상으로는 순종(順宗)이라고 불립니다.
쉰지(순종)는 청 제12대 황제로, 그가 황제로 즉위한 시기는 1908년입니다. 하지만 이때 청 제국은 이미 중국 내외에서 강력한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중국 내부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고 중앙 집권력의 약화로 인해 지방 귀족과 지방 세력들이 점차 권력을 획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청 제국은 서유럽과 일본의 강대국에 의해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일본에게 패배하여 만주족의 청 제국에 대한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내부에서는 청제국에 대한 반대가 더욱 강화되고, 청 제국은 점차적으로 붕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1908년에 쉰지(순종)이 황제로 즉위한 직후에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청제국의 패권을 되찾으려는 보수적 세력과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 사이에서 대립이 이뤄졌고, 황제 스스로에게도 그야말로 권력을 행사할 여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12년 2월 12일, 청 황제 쉰지(순종)는 6세에 해당하는 연세로만 당당히 행사할 수 있었던 황제직을 폐기하고 왕실의 귀족들과 함께 만주국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로써 청 제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맞이하고, 만주국도 잠시 후에 중화민국으로 변경되며 중국은 공화국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후 쉰지(순종)는 그의 인생의 나머지를 평생을 더한 후, 1922년에 숨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푸이를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1931년 11월 13일 푸이는 만주
잉커우(營口)에 도착했고, 이듬해 만주국 집정으로 취임했다. 1934년 3월 1일 푸이는 만주국 황제에 즉위해 강덕제(康德帝)로 불리웠지만, 일본 관동군의
꼭두각시였습니다.
만주국 황제 재위기간은 11년, 청나라 황제 재위 3년보다 훨씬 길지만 그는
궁궐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사실상 실권 없는 황제 노릇을 했을 뿐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의 선택이 아니라 일본이 중국 과의 전쟁 이후에 만주국이라는 명목상의 국가를 만들어 이의 통치를 푸이에게 맡긴 것 입니다. 어쩔 수 없이 1931년 9월 만주국의 집정관이 되지만 이에 대한 통치는 사실상 일본인이 하게 된 것 입니다. 그는 그냥 허수아비 왕이 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푸이[溥儀]는 중국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簿儀]'이며, 광서제(光緖帝)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豊)의 아들이다. 1908년 10월 서태후(西太后)는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의 뒤를 잇기 위해 푸이에게 제위를 잇게 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했고, 그해 11월 14일 광서제가 죽자 푸이는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었다. 연호는 '선통(宣統)'이라 했으며,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섭정했다. 순친왕은 황족이 절대 다수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황족 중심의 집권화를 도모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진압 과정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청 조정의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위안스카이는 난징[南京]에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하여 수립된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청을 물러나게 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는 대신 총통 자리를 물려준다는 쑨원의 약속을 받고, 북부의 군벌들을 동원해 공화정을 선포하도록 청 왕조를 압박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황태후가 푸이를 대신해 퇴위 조서를 반포했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베이징[北京]에서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청 왕조는 멸망했고, 푸이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푸이는 퇴위 후에도 쯔진청[紫禁城]에서 생활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그의 직할 부대였던 베이양[北洋] 군벌은 안후이[安徽]파와 즈리[直隷]파, 펑톈[奉天]파 등으로 나뉘어 파벌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해 1917년 6월 안후이 독군(督軍) 장쉰[張勛]은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보황당(保皇黨) 일파와 함께 청의 부활을 추진하는 복고적 정변을 일으켰다. 장쉰은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위안스카이의 총통 자리를 계승한 리위안훙[黎元洪]을 퇴진시키고 푸이의 복벽(復辟)을 선언했다. 그러나 돤치루이[段棋瑞]가 공화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장쉰을 제거하면서 푸이는 다시 퇴위를 선포했다
1924년 즈리파와 펑톈파 군벌 사이에 일어난 제2차 펑톈즈리전쟁 당시 푸이는 베이징을 점령한 펑위샹[馮玉祥]에 의해 쯔진청에서 쫓겨났다. 순친왕 재풍의 거처로 옮겼다가 다시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일본인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호송되어 일본 조계(租界)에 머물렀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만주전쟁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했으며,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워 푸이에게 집정(執政)을 요구했다. 수도는 신징(新京, 지금의 吉林省 長春),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1934년 3월에는 제정(帝政)을 선포하고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푸이는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고, 중국인 총리와 각부대신과 함께했지만, 만주국의 모든 실권은 일본의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 관동군이 괴멸하자 곳곳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 만주국은 붕괴되었다. 푸이는 8월 17일 선양(瀋陽)에서 소련군에 체포되어 전범으로 하바롭스크(Khabarovsk)에 억류되었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했으며, 1950년 8월 초 중국으로 압송되어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다. 1959년 12월 4일 마오쩌둥[毛澤東]의 특별사면령으로 풀려난 후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전범관리소에서 교화 생활을 하면서 1957년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내 죄악의 전반생’이라는 반성문을 집필했다. 1964년 이를 바탕으로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이라는 자서전을 정식 출간했다. 이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삼아 1987년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가 《마지막 황제(L'ultimo imperatore)》라는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푸이는 1964년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연구위원회(文史資料硏究委員會)로 전출되어 자료 전문위원을 역임하면서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67년 10월 17일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八寶山)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에 베이징 남서쪽 허베이성[河北省] 이[易]현에 있는 청나라 황릉으로 이장되었다. 청의 옛 황실에서 그에게 '공종 민황제(恭宗 愍皇帝)'라는 시호를 추증했으나 중국 정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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