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를 1.4후퇴라고 한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다시 인민군을 몰아붙여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며, 같은 날 서울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동반하여 서울 수복식을 거행하였고 비로소 90여일간 죽음에 사로잡혔던 서울 시민은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에 대한 기본적인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북진이 전개되어 10월 19일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까지 다다랐고,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인민 지원군 28만명이 전투에 개입하여(11월 28일)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연합군은 장진호 지구의 혈전을 전사(戰史)에 남기고 철수 작전을 시작하여 서울 시민은 또다시 쓰라린 1·4 후퇴를 겪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