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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06.03

궁예는 왜 개성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겼나요?

안녕하세요 궁예는 개성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것으로 아는데요 그때 백성이 원성이 자자했다고 들었는데 왜 수도를 옮긴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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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3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예는 매우 직접적으로 백성의 삶에 너무나도 큰 피해를 끼쳤다. 바로 그가 추진한 철원 천도 때문이다. 애초에 일부에서 제기하는 대로 민본사상과 애민정신을 가진 군주였다면 구태여 철원 같은 말도 안 되는 입지에 백성들을 몰아 넣으면서까지 천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수도 건설을 강행하면 물론 호족들이 물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면서 왕권이 반사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징수당하고, 또 호족들과 달리 직접 수도 건설 공사에 동원되어 고통받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다. 게다가 철원 천도는 그냥 천도도 아니고, 이제 막 건설한 송악을 간단히 버리고 허허 벌판에 신도시를 지어 강행한, 역사상 보기 드문 사례였다.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지 수양제의 낙양 건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막장 정책이다. 당연히 호족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민간에 대한 수탈과 과중한 부역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의 천 년 뒤인 조선시대 말기,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의 경우 처음에야 지배층의 헌금이 주였지만 결국에는 당백전과 도성 통행세 등 갖은 무리수로 이어졌다. 도시도 아니고 그저 궁궐이었음에도. 궁예의 종교 탄압 역시 반론의 여지가 없는 폭압정치의 사례다.

    궁예가 도주할 때 우호적인 설화가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철원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 한탄강 수운에 의한 물자 공급이 어려운 철원에서는 쌀값이 급등했는데, 그렇다면 철원에 쌀을 공급했던 철원 근교의 지주나 농민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은 궁예에게 호의적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또한 정변의 수장 왕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지역의 옛 고구려 지역의 패서계 호족의 맹주였으며 옛 수도 송악을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니 그가 집권하면 철원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뻔한 이치다.

    철원은 전근대 관점에서는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광복 직후 남북분단과 6.25 전쟁으로 인해 휴전선이 통과하는 문제로 생긴 일. 일제강점기 초 경원선 철도가 부설되며 철원은 서울~원산의 중간점이자 인근 이천, 평강, 김화 등 강원도 서북권의 교통 거점은 물론 금강산선을 통해 금강산 관광의 거점 역할까지 하는 교통의 요지로 성장했으며, 1940년대만 하여도 38선 이북 강원도에서 도시 기능을 수행하는 곳은 철원 한 곳 뿐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로동당 강원도당도 철원에 있었다.

    그런 철원이 궁예 당시에 수도 노릇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궁예라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고, 불완전한 입지는 궁예의 몰락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오히려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궁예는 최소한 자신의 절대 권력 수립을 위해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공포 정치를 펴다가 실패한 임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나 그 행동들을 보면 개별적으로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인 틀에서 봤을때는 모순이 발견되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즉 궁예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아예 정신을 놔버렸다는 설이 괜히 나오는 이유다. 납득할 수 없는 궁예의 이상성격에 드라마는 흥미를 더해가지만, 불행히도 이런 궁예의 이상성격은 편집성 성격장애[22]의 한 단면이다.

    공포 정치를 자행한 시점에서 폭군의 요소는 충분하며, 백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친 철원 천도에 이르면 빼도 박도 못하고 폭군이다. 다만 수양제, 해릉양왕, 연산군 급의 톱클래스 폭군이 아니고 다소간 개인적 능력을 재평가할 여지가 있을 뿐이다. 사실 능력으로 폭군 여부를 따지자면 수양제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시절에는 남진 평정에 참여했고 끝끝내 대운하를 완성시키는 등 능력은 꽤 준수했던 사람이니 폭군에서 빠져야 한다. 한 가지 정상참작을 하자면 궁예의 경우는 당시 신라 말기는 급격히 몰락해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궁예 역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점과 무리한 왕권 전제화에 대해서도 내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부분은 참작이 된다.

    또 하나 궁예에 대한 변호 논리 중 하나는, 왕조를 개창한 창업 군주는 난세속에서 갖은 고초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에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고, 또 마음이 매우 굳세지는 이유로 폭군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가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수양제의 경우를 들면, 그는 아버지 수문제처럼 창업 황제가 아닌 수나라의 수성 황제였지만 제위 등극 후 폭정을 저질러 나라와 수 왕조와 자신을 망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양제의 경우, 그가 황제로 즉위했을때, 이미 수나라는 통일이 다 된 상태였고, 수양제는 뒤를 이어 수성을 해야할 판국에 되려 폭정과 전쟁을 벌인 통에 처참히 멸망했으나 궁예의 경우는 아직 통일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내전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궁예와 비교되는 인물은 중국의 경우, 진나라 말기의 항우와 남북조 시대의 북조 전진의 황제 부견과 남조 양무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지도자들도 다들 초기에 나름 잘나갔다가 시간이 갈수록 실정을 저질러 끝내 망했던 인물들이라고 보면 된다. 직언을 듣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꽤나 비슷했다. 또한 '항우'의 경우는 궁예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탁월했으나, 대신에 궁예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부견의 경우는 궁예가 나주 전투에서 승리해 통일에 근접했던 것과 달리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비수대전에서의 엄청난 실책을 보여 대패해 몰락한 것을 보면 이는 견훤이 고창 전투에서 대패해서 몰락한 것과 비슷해서 부견의 경우는 궁예보단 견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양무제'의 경우가 궁예랑 비슷한 케이스에 근접하는데 둘 다 불교를 혹신했고, 실정을 했을때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만, 양무제는 항우나 수양제, 궁예 같은 폭정을 저지른 폭군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인자한 성군이었지만 지나친 불교에 대한 혹신과 이로 인한 불교계의 극심한 부패, 그리고 지나치게 어질기만 한 정치로 망한 케이스로 소위 '인자한 창업 암군' 스타일이지, 항우 ,수양제, 궁예 같은 '창업형 폭군' 스타일은 아니였다.

    또 비록 당 왕조의 창업 군주는 아니지만, 원래 황제가 될 처지가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황제가 되어 사실상 창업 황제의 성격이 강한, 우리에게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너무나 유명한 당현종의 경우, 정변을 일으켜 당중종의 황후인 위황후와 딸인 안락공주를 제거한 후 제위에 올라 이후 군사를 일으켜 태평공주를 제거해 측천무후 사후,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던 여성권력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후 재위 전반과 중반까지는 개원의 치로 불리는 눈부신 선정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중 하나를 구가했지만 재위 후반에 초심을 잃고 정사를 멀리하고 양귀비 같은 총비와 간신들에게 놀아나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고 결국 안록산의 대규모 반란으로 민심을 잃어 아들인 당숙종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심지어 그 이후 아들인 숙종에게 시해당했다는 의혹까지 강하게 받고 있다.

    즉, 궁예 같이 초심을 잃어 망한 창업군주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창업 군주는 위에서 이야기된 이유들 때문에 무조건 어질고 유능하고, 절대 무능해지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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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예의 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기저에 천도에 관한 일반론과 궁예가 천도를 해야만 했던 특수론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둘을 나누어서 설명을 드릴까 하네요.

    첫째, 천도에 관한 일반론입니다.

    근대 이전 군주제의 국가에서 천도를 선택하는 경우는 대외적인 이유와 대내적인 이유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대외적인 이유는 또한 공세적 천도와 수세적 천도로 나눌 수 있죠.

    공세적 천도란 고구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내위나암에서 평양성으로의 천도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하 광개토대왕)의 원정의 결과, 동서남북으로 확장된 영역의 효율적인 지배가 필요하였고, 또한 서부전선이 안정됨에 따라 남부전선의 안정이 필요하였습니다.

    서부전선의 안정이라 함은 사실상 후연이 내부분열로 인하여 붕괴되고 친고구리정권이 성립함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붕어 이후 즉위한 장수왕에게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크나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래로 부왕의 업적이 크나큰 이후, 그 아들이 나라를 망친 경우가 종종 사서에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아마 그런 심적인 부담이 무리한 정책의 실행을 유도한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미완성의 것이었습니다.

    16대 고국원왕의 전사에 대한 복수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장수왕은 이의 완성을 위해 과감하게 평양으로 천도하여 고구리 군의 창끝을 남으로 돌리게 된 것입니다.

    대외적인 이유에서 수세적 천도는 알고 계시겠지만, 백제의 한성 탈출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인접국의 국력이 자국의 국력을 능가하고 감히 맞대어 대항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한 관계로 도읍을 국경에서 멀리 떨어뜨려 내부 안정부터 도모하자는 입장입니다.

    대내적인 경우는 정치적인 이유, 경제적인 이유, 사회문화적인 이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는 신권이 크게 신장하여 왕권을 짓누를 때, 신하들의 기반이 되어버린 도읍을 버리고 신하들의 입김이 낮은 지역으로 옮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백제의 한성탈출 이후, 감행되는 사비로의 천도가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중국의 사서에 보면 '백제 대성 8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대성 8족'은 백제 국초부터 존재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백제본기>>를 보면, 백제 국초와 한성 시대를 관통하여 명성과 권력이 막강했던 신하들은 거의가 비류와 온조의 남하에 동참했던 해씨 가문과 진씨 가문에서 나오는 이들이고, 웅진 천도 이후에야 '대성 8족'류의 신하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웅진 시기에 백제의 왕권은 그리 강한 것이 아니어서, 신하들의 권력 다툼 와중에 왕이 희생되는 경우가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이에 백제 왕실은 '대성 8족'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 인접지역으로의 이주를 꿈꾸었던 것이고, 그 결과물이 사비 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제적인 이유에서의 천도는 실상 한국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치수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중국 사회에서 보였던 천도의 예인데, 거의가 황하의 범람으로 인한 수로의 변화로 인했던 것입니다.

    중국 고대왕조에 상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상의 전반기 역사 250년에서 발생했던 5번의 천도는 모조리 이러한 경우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회문화적인 이유에서의 천도는 보다 근대사회로 접근하거나 현대사회에서 종종 발생하는 경우에서의 천도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국토의 효율적인 개발과 지역 균등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라질이 리우데자네이로를 버리고 브라질리아로 수도를 옮긴 경우와 근자에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행정수도 이전이 이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궁예의 특수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궁예가 세웠던 나라는 후고구리입니다.

    고구리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나라죠.

    초창기 구 고구리 지역의 영토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좋은 명분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명분을 들어 한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을 휘하에 편입하였습니다.

    궁예가 꿈꾸었던 나라가 거기까지였다면, 궁예는 천도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궁예가 중원경을 장악하면서 한강의 수로를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국가적 부가 확장되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궁예의 나라는 변화를 추진합니다.

    고구리의 부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삼한을 통합하여 대중원투쟁의 선봉에 서겠다는 야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삼한을 통합하는데 있어서 고구리의 색채를 강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백제와 신라 지역 호족과 주민들에게 그다지 호감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궁예가 선택한 것이 고구리 색채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정책의 실행이 철원 천도와 국호 개명이었습니다.

    고구리를 버리고, '동방의 큰 나라'라는 의미의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 것은 그런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리의 색채를 버린다는 것은 결국 고구리 계열 신하들이 지금껏 누려왔던 기득권을 백제와 신라에서 유입한 새로운 신하들에게 나누어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고구리 계열의 신하들은 이를 두려워 했습니다.

    궁예는 끊임없이 고구리 계열의 신하들에게 경고를 했죠.

    그것이 '관심법'이라는 것입니다.

    관심법을 통해 고구리 계열의 신하들에게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리 계열의 신하들은 기득권을 잃느니 투쟁을 하는 방안을 도모했고, 이에 대해 궁예는 고구리 계열 호족 집안을 지지했던 자신의 왕비와 두 자식마저 버려가면서까지 고구리 계열 호족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궁예가 왕건을 필두로 한 송악 호족을 포섭하면서 사실상 군권을 송악호족들이 장악을 하였기에, 궁예의 견제는 힘이 없는 명분상의 견제에 그치게 된 것이고, 결국 고구리 계열 호족들은 군권을 장악한 송악 호족을 내세워 궁예를 권력에서 쫓아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려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죠.

    정권을 장악한 고려의 입장에서 궁예를 아름답게 쓸 수는 없었죠.

    그래서, 고려의 사서와 고려의 사서를 읽고서 쓴 조선의 사서에서 궁예는 진훤과 더불어 한국사 최악의 폭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서양학자들의 주장에서 비롯되긴 하였지만, 궁예와 진훤을 재조명하자는 운동이 사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잘못된 역사 전승을 바로 잡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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