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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2.19

청나라 건륭제는 어떻게 황제에 올랐나요?

건륭제는 청나라 6대 황제인데요.

아버지인 옹정제와 똑같이 황제의 4번째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4남이 어떻게 황제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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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자금성 인근 옹친왕부에서 당시 시첩이던 뉴호록씨와 옹친왕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력의 어머니 뉴호록씨는 만주족이었지만 출신이 미천하여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수녀(秀女)가 된 뒤 옹친왕부에 배속되어, 윤진의 후궁인 측복진(側福晉) 이씨[3]의 시녀로 있었다.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에 의하여 그다지 부각되지 않던 홍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꿰뚫어 암송하고 시를 잘 지어 1720년(강희 59년) 겨울에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특별히 궁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였다.

    황손인 홍력은 황자들만 교육받을 수 있던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하였는데 이곳에선 홍력 이외에도 자질이 남다른 여러 황손들과 홍력과 동갑인 숙부 윤희(胤禧)도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강희제에게는 20명의 황자와 100명 안팎의 손자가 있었는데 강희제는 손자들의 상당수를 알지도, 심지어는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황손들 중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특별히 뽑힌 홍력이 문재에도 탁월하였고 사냥에서는 어린 나이에 곰을 두려워하지 않고 화살로 힘들이지 않고 잡자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긴 강희제는 어릴 때의 자신을 닮았다며 홍력에게 기본적인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자금성을 지키는 금군 무관에게 명해 홍력에게 무예를 전수해줄 것을 명하였다. 어떤 때에는 노구의 강희제가 직접 홍력의 무술을 보고 가르치고 같이 수련하였다. 궁정에서 살면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주 자신이 살던 옹친왕부로가 부왕인 옹친왕 윤진과 적모인 적복진 오라나랍씨, 그리고 어머니에게 문안드렸고 이러한 성실한 모습을 본 강희제가 더욱더 총애하였다.

    1722년(강희 61년) 12월, 홍력의 조부이자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가 노환으로 붕어하자, 당시 정국을 면밀히 관찰하던 홍력의 아버지 옹친왕 윤진이 군사들과 대신들을 이용하여 황위에 오르니 이가 옹정제이다. 강희제는 임종 직전, 윤진을 불러서 미래의 황제는 홍력이니 황위를 반드시 홍력에게 물려주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에 따라 황위에 오른 옹정제는 미리 황태자로서 홍력의 이름을 써서 그 함을 건청궁의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올려놓았다.

    강희제와 같이 홍력의 재주를 귀히 여기던 옹정제는 상서방에 계속 보내어 공부를 시키게 하였고 홍력을 지도하였다. 이듬해인 1723년(옹정 원년) 옹정제는 13살의 홍력에게 자기 대신 선황제인 강희제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세간에서는 이미 옹정제가 홍력을 후계자로 눈여겨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홍력이 나이가 들수록 학식 또한 깊어지자 옹정제는 홍력의 제왕학을 손수 가르치고 홍력이 정치를 배우는 데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이를 바로 잡아주었다. 홍력은 오전에는 서화에 몰두하였고 정오에서 유시(酉時, 오후 6시)까지 정무에 매달리며 한편으로는 쉬운 국정을 처리하면서 정치를 배워갔다.

    그러나 옹정제의 셋째 아들이자 홍력의 이복형인 패륵 홍시(弘時)는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옹정제와 척을 지고 있던 숙부이자 강희제의 8남 염친왕 윤사(廉親王 胤禩)와 손을 잡았다. 윤사가 노골적으로 부추기자 홍시는 홍력을 모함하였으나, 옹정제는 오히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홍력을 몰아붙이는 홍시를 의심하였다. 1725년(옹정 3년), 홍시가 홍력을 암살하려던 일이 발생하자 진노한 옹정제는 홍시를 윤사의 아들로 입적시켜버렸고 1727년(옹정 5년)에는 윤사 일당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이유로 모두 잡아들여 하옥시키고 아들인 홍시마저도 잡아들인 후, 황실 대동보에서 그의 이름을 제명하였다.[ 이 때 잡힌 윤사, 윤당은 곧 옥에서 독살당하고 홍시 역시 얼마 안 가 감옥 안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에, 홍력은 부찰씨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더 이상 홍력에 맞서 황위를 노리는 경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홍시가 죽고 난 후, 홍력이 당시 옹정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였기에, 대다수 대신들은 이변이 없는 한, 홍력이 황위를 승계할 것이라 믿었다. 1733년(옹정 11년), 홍력은 화석친왕(和碩親王) 직을 제수받고 보친왕(寶親王)이라 불렸고 이 때부터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군기처에서 지내며 아직 완전히 섬멸되지 않은 몽골의 준가르 부족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 또한 태묘, 사직 대제나 공자와 관우의 제사 등 황제가 주관해야 할 국가의 중요 대사를 옹정제를 대신하여 주관하였다. 1734년(옹정 12년), 옹정제가 연로해져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에는 홍력이 나서서 섭정으로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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