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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11

중국 청나라의 유명한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오랫동안 머문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중국 청나라 말기에 위안스카이는 관리로서 나중에는 스스로 황제까지 오르는 인물이 되는데요 이런 유명한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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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안스카이의 경력은 조선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는 우창칭의 휘하로 참전했습니다. 본대가 철수한 후에도 1894년 청일전쟁 직전까지 갑신정변 진압에서 맹활약하는 등 사실상 조선 총독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에 조선에서 그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우창칭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이때 위안스카이는 우창칭의 휘하로 참전했고 임오군란의 수괴로 지목된 흥선 대원군을 압송하여 텐진에 연금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후 본대가 철수한 후에도 1894년 청일전쟁 직전까지 갑신정변진압에서 맹활약하는 등 사실상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역할로서 조선 총독(감국대신) 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1859년(철종 10)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태어났다. 과거(科擧)를 2번 낙방하고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서 일을 맡았다.

    1882년(고종 19) 조선에서 신식군대와 구식군대간의 차별문제로 구식군대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을 빌미로 오창칭을 따라 조선으로 부임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이후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가 되어 조선에 계속 주재하였다.

    청나라 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자 친청(親淸) 수구세력과 갈등을 하던 개화파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지속되는 압박에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일본과 손잡고 친청수구정책에 대항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주둔하던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며 개화파를 공격하여 고종을 구출했다. 이 사건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양국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 된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철수하지 않고 이후에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청군을 파견하게 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빌미삼아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는 결국 청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집권자였던 리훙장[李鴻章]이 실각하고 위안스카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서태후(西太后)의 총애를 얻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서태후가 죽은 후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다시 군권을 장악하고 쑨원[孫文]과 손잡고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이후 1913년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고, 1916년 6월 사망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10여 년을 거주하며 지금의 중구 충무로 거리 일대를 사들여 중국인 전용 거리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세력을 확장시켜 충무로 일대를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