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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7.12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몇 차까지 시도되었던 것인가요

몽골 원나라는 일본 정복을 위해서 여러 차례 노력을 하였는데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원나라몽골의 일본정복을 위한 시도는 몇 차까지 계속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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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1274년과 1281년의 두 번에 걸쳐 시도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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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총 2차례 시도되었습니다.


    첫 번째 원정은 89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원나라의 황제인 하와란(和闐)은 동북 아시아에서 권력을 확장하고자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발동했습니다. 하와란은 894년에 원나라의 함대와 군대를 동원하여 일본으로 침입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일본의 항마(抗馬) 지역에서 격렬한 저항을 받고 실패하였습니다. 일본의 강력한 저항과 부도덕한 전략으로 원나라는 패배하고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원정은 1252년부터 1259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원나라의 황제인 고비린(宗室悖臨)은 대왕(大王) 이토 마사시게(伊東祐景)를 지원하고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원정군은 당시의 일본 미나모토(源) 실족과 전투를 벌였으며, 전략적으로 일본을 분열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원정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1259년에 고비린은 본토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두 차례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러한 원정은 일본의 독립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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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나라의 일본 원정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259년 여몽전쟁에서 패배하고 강화한 후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된 고려 역시 연합군으로서 동원되었으나, 원나라군의 전투 의지 부족 및 태풍 등 자연재해의 발생과 막부의 반격 등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으며,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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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3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70년 11월 원의 세조는 일본 침략을 결정하고 고려에 둔전병(屯田兵)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마침 고려에서 일어난 삼별초(三別抄)의 난(亂)(1270∼1273)으로 인해 그 실행이 불가능했으며, 1273년 4월 삼별초를 평정함으로써 저해요인이 사라지자 전열을 정비, 그 이듬해에 일본 침략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1274년 1차원정에서 원나라는 홀돈(忽敦 : 忻都)을 도원수(都元帥), 홍다구(洪茶丘)를 우부원수(右副元首), 유복형(劉復亨)을 좌부원수(左副元首)로 하고, 고려는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都督使), 김신(金侁)을 좌군사(左軍使),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右軍使)로 한 이른바 삼익군(三翼軍)으로 이를 돕게 하였다.


    당시 합포(合浦)를 출발할 때의 군세는 몽한군(蒙漢軍) 25,000명, 고려군 8,000명, 초공(梢工) · 인해(引海) · 수수(水手)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척이었다.


    연합군은 먼저 쓰시마(對馬島)를 정벌한 뒤 이키도(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다. 다시 북큐슈(北九州)의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肥前)의 마쓰우라(松浦)를 짓밟고, 하카타만(博多灣)에 도착해 하카타 · 하코사키(箱崎) · 이마쓰(今津) 등지에 상륙하였다.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전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野戰)에 능숙하고 화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왔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1만 3500명이나 되었다. 당시 고려인인 홍다구와 의견 충돌이 잦았던 것으로 보아, 군사작전의 문제로 실패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원나라는 제1차 일본 정벌(日本征伐)에서 큰 손실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탐라(耽羅)에 목마장(牧馬場)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征收日本行中書省, 行東行省)이라는 관부(官府)를 고려에 설치하였다. 한편,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 2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그 사신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에 남송을 멸망시킨 원나라는 1281년(충렬왕 7) 제2차 일본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동안 일본 원정에 소극적이던 고려는 적극적으로 원정 계획에 참여했다. 특히 충렬왕은 일본원정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홍다구 등의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축출하고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왜구의 근절을 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때 군세는 동로군(東路軍) · 강남군(江南軍)의 양군으로 편성되어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明州) · 정해(定海) 등 강남에서 출발하였다. 동로군은 여 · 원 연합으로 편성되어 총병력 4만 명에 함선 9백 척이었다. 그 중 원나라가 3만 명, 고려가 1만 명이었으며 함선 900척은 역시 고려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중국 강남지역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총병력 약 10만 명에 함선 약 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제1차 때와 같이 김방경과 홀돈의 지휘하에 합포를 출발, 이키도를 비롯해 구주 연안의 모든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만을 향해 공격하였다. 강남군은 원장(元將) 범문호(范文虎)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 구주 연안의 오도(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고, 다자이부를 향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저항이 예상외로 강했고 또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 · 함선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제2차 정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차에 걸친 일본정벌의 실패는 태풍과 해전에 미숙함이 주요한 이유가 되었지만, 제일 큰 실패 원인은 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던 데 있었다. 또한 국내사정도 혼란하였을 뿐 아니라 남송의 유민들마저 일본정벌의 불리함을 알고 종군하기를 꺼려하여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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