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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식한황로156
박식한황로15623.02.25

프랑스와 영국은 왜 전쟁을 하게 됐나요?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전쟁은 왜 일어난건가요? 100년동안 지겹게 서로 전쟁을 한다는건 두나라에 엄청 피해를주는 일인데도 계속한 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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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백년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영토 문제와 왕위 계승 문제로 일어났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영국이 파리까지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 했지만, 잔다르크의 등장과 프랑스 국민들의 저항으로 프랑스가 이겼습니다. 프랑스를 전쟁터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여 년 동안 계속 되었던 전쟁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337년~1453년 영국과 프랑스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와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혀 영국군이 침입함으로써 발단이 되었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영국이 파리까지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 했지만, 잔다르크의 등장과 프랑스 국민들의 저항으로 프랑스가 이겼습니다.

    프랑스를 전쟁터로 하여 여러 차례 휴전과 전쟁을 되풀이했습니다. 전쟁의 기간은 백년 이상으로 이를 두고 백년전쟁이라고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수세기 동안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경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대립과 대결로 이어졌으며, 18세기 후반에는 프랑스의 군사적 성장으로 인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56년에 일어난 "세계 대전"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은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이전에 이미 유럽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전쟁은 세계적인 전쟁으로 번지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대립 상황이지만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던 이유도, 두 나라의 영토나 국경 문제 때문이 아니라 경제, 외교, 신앙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이 전쟁은 1763년의 파리 조약으로 끝나며, 이를 통해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영토를 쟁탈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 유럽의 봉건 사회가 몰락할 무렵 프랑스는 필리프 4세의 노력으로 왕권이 매우 강해졌는데 필리프 6세때 영국의 간섭으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국왕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에드워드 3세 자신이 프랑스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필리프 6세보다 프랑스 왕족 혈통에 더 가깝다는것을 근거로 삼아 주장하는데 필리스 6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프랑스를 다스리던 샤를 4세에게는 왕자가 없어 왕실에서 샤를 4세의 사촌형제인 발루아 백작을 왕으로 올렸는데 발루아 백작이 필리프 6세입니다.

    이때 샤를 4세의 외손자인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이 프랑스 국왕이 되는게 옳다며 나서고 , 에드워드 3세는 이 기회에 프랑스 땅을 영국에 합치고 싶어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특히 플랑드르 땅과 귀옌 지방이 탐이 났는데, 플랑드르 지방은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 귀옌은 포도주 생산지로 유명하여 두 곳을 점령하면 큰 돈을 벌어들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339년 영국의 함대가 플랑드르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함대를 향해 대포를 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0년전쟁(1337~1453)은 프랑스와 영국의 장기적인 갈등과 경쟁에서 발생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원인이 복잡하며 다양한 인자들이 작용하여 일어났습니다.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입니다.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사망하면서 후계자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에 대해 프랑스 귀족 중에서 샤를 4세의 삼촌인 에드워드 3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집단과 프랑스 왕족 중에서 다른 계승자를 지지하는 집단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337년에 영국 왕국이 프랑스에 대한 영토요구권을 주장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프랑스의 중심지인 파리를 점령하며, 프랑스는 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지속했습니다.

    또한 이 전쟁은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에 대한 영국의 대항과 경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00년 전쟁 중반에는 프랑스 군이 왕궁 내부에서 발생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약해졌고, 이에 대해 영국은 이를 기회로 프랑스에 대한 군사적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종교 갈등이 있었으며, 영국은 로마 카톨릭교를 탈퇴하여 프로테스탄트인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인자들이 작용하여 100년전쟁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프랑스와 영국의 국가성장과 국가감정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두 나라의 군사력과 국가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스코뉴지방 지배권분쟁


    이당시만해도 이지방은 영국영토였으면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


    (가스코뉴의 포도주로 들어오는 세금이 영국 전체의 세금보다 많았다)



    항상 이지역을 두고 영국하고 프랑스는 마찰을 빚어왔다.



    또한, 잉글랜드 헨리2세가 가스코뉴지방 위쪽에 있는 아키텐(보르도) 지방 차지하고 있었다.이곳은 지금도 세계적인 와인 산지이다.



    또 하나의 분쟁 지역 플랑드로지방(벨기에) 플랑드로는 영국하고 밀접한


    관계을 맺고 있었는데,영국은 플랑드로에 양모을 수출하구 플랑드로에서는


    직조을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4세가 후계자없이


    사망하자,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카페왕조의 후계자 자격을 주장했는데


    프랑스입장에서는 용납할수 없는 일이였다.


    가스코뉴지방 지배권을 놓구 싸우다 프랑스 왕위계승문제로 발단이되어


    백년전쟁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