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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코브라279
검붉은코브라27923.10.24

스위스가 중립국이 된 역사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전세계에서 대표적인 중립국으로 알려진 나라는 스위스로 알려져있는데요.은행 등으로도 유명한 이 나라가 중립국이 된 역사적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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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라 등 현상변경의 의지가 있는 국가들로 둘러싸인 지정학적인 요충지로 인해 로마시대부터 끊임없이 주변국들의 전쟁에 시달린 스위스. 1500년대부터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 끝에 300년이 지난 1815년 빈 회의에서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인정 받는다. 하지만, 세계제2차대전에서 중립국을 선언했던 나라들은 많았지만, 유일하게 중립국 지위를 유지했던 스위스. 단순히 중립국이라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까? 강대국이 그냥 밀고 가면 그만인데 말이다. 그 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1. 경제적 요인 - 독일이 스위스프랑을 전시 기축통화로 사용했기 때문에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서는 스위스프랑의 안정성 유지가 필요했다.

    독일이 제3국으로부터 석유, 철강 등 자원과 제품들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결제수단이 필요했는데 전쟁 참가국의 통화는 언제든 휴지조각이 될 수 있었기에 파운드화나 달러화는 이용이 거부당했고, 그 대안으로 기존에 역내결제수단으로 일부 사용되던 스위스프랑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일은 실제 스위스를 침공할 계획들이 있었다. 스위스가 중립국이 될 수 있었던 실질적인 이유는 바로 철저한 전쟁 준비에 있었다.

    2.스위스의 철저한 전쟁 준비

    스위스의 공식명칭은 '헬베티카 연방'이다. 다시말해, 스위스는 각 각의 주가 있고, 그 각각의 주가 각 자의 자치권을 갖는 연방제 국가이다. 한마디로, 의사결정이 쉽지않고 결핏하면 갈등과 반목이 일어나는 그야말로 아주 다양한 민족(스위스의 조상은 헬베티족이지만, 독일계65%, 프랑스계18%, 이탈리아계10%)과 다양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유럽의 각 국가들이 독일에 큰 우려를 하고 있지않았을 때, 독일의 자본 흐름을 보고있던 스위스는 세계제2차대전 발발전에 독일의 전쟁 준비를 인식하고 있었다. 독일의 자본 흐름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로 인한 전쟁 가능성과 그 대비는 사실 또 다른 문제인데, 스위스는 우려하고 있지만 않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대비하였다.

    가장 먼저, 1933년 5월 12일에 스위스내 나치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안을 만들었다. 독일과 스위스의 접경지역에서 유대인이나 슬라브인, 집시(인도 아리아계 유랑민) 등에 대한 폭행과 테러 등 나치 활동이 빈번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치상징이나 나치와 관련된 행동 등을 금지시켰다. (유럽의 극우은 나치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을 의미하지만 대체로 나치주의나 친러주의를 의미한다) 예, 군사기밀을 독일에 전해준 스위스군 장교와 외국인 등 30여 명을체포하여 단심제로 17명을 사형시킴. 한국 같으면 무슨 단심제냐며 그 자체만으로도 헌법위반이라며 지금쯤 천문학적인 국가배상금 청구하고 국가유공자로 등록하는 등 아주 생난리를 치고 있을 일.

    그리고 스위스는 재무장에 돌입한다. (스위스의 재무장)

    먼저, 연방의원이면서 초대 국방장관이였던 루돌프 밍거가 16세에서 19세 사이의 연령에 대한 의무군사교육훈련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국민들이 군사 안보에 무관심했었기에 극심한 반대와 비협조에 부딪쳤다. 하지만 언론이 나서서 국민들의 여론 조성에 나서게 된다. 독일이 스위스를 침공할 경우에 대한 대응과 전력 분석 등에 대한 보도를 한 것이다. 물론 독일은 스위스 언론의 보도에 '터무이없는 보도'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결국 1933년10월13일에 기존보다 10배가 증액된 국방예산안이 올아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10월14일에 독일은 국제연맹에서 탈퇴 선언을 하였다.

    그러자 1933년10월18일에 스위스 연방은 10배가 증액된 국방예산안을 승인 확정했다. 그렇게 10배가 증액된 국방예산의 총액으로도 다른 유렵국가들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이였지만, 그 사용처에 있어 스위스의 국방예산은 달랐다. 다른 유럽국가들이 국방비를 아무리 늘려도 대부분이 인건비 등 경상비에 집중된 반면에 스위스는 상비군체제가 아닌 예비군체제였기에 대부분의 금액이 경상비가 아닌 무기나 장비 구입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참고로, 현재 한국의 국방예산의 70% 정도는 바로 그 경상비 지출이라고 한다.

    그리고 1933년 말에 또다시 비슷한 금액의 국방예산을 추가 증액했다.

    심지어 정당과 경제 사회조직까지도 각 조직내에 나치에 대항할 '투쟁조직'을 만들어서 국민 단합과 계몽 황동을 전개하면서 의회와 언론 등을 통한 각 종 토론회를 개최하여 나치 퇴치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여론 활동을 통해서 30만명에 달하는 예비군을 운용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지만, 각 정당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자 스위스 연방에서는 정당을 없애버리는 최강수를 두게 된다. 모든 정당은 각 정당을 상징하는 마크나 색깔, 유니폼 등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정당별 구별을 없애고 하나로 모으는 조치를 한 것이다.

    그러고나서 본격적인 군사훈련에 돌입한다.

    독일군과 같은 대규모 기갑전력이 없어서 보병과 산악병 중심의 게릴라전술훈련이다.

    1934년 7월27일 스위스 육군 제1사단이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사단급 훈련은 전쟁이 임박했을 때나 할 정도의 아주 이례적인 대규모 훈련이였다. 그리고 1945년까지 최신의 K31카빈소총 35만정을 보급했다. 1945년 당시 한국은 일본의 99식 소총 등 약 4만정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1935년에는 의무군사교욱 훈련안이 통과 되었다.

    1935년3월16일 히틀러가 베르사유조약을 취소하는 선언을 한다. 프랑스, 폴란드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며, 오스트리아 내전에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유렵 각 국들은 히틀러를 신뢰하며, 관련 문제들이 외교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위스는 히틀러의 선언 이후 국가긴축 운용에 돌입하고 정부기구를 통폐합시켰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버리고 의회독재를 허락했다. 그리고 독일과 접경지역에 대전차 장애물 등 방어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1937년부터는 독일 공군과 공수부대의 공격에 대한 집중적인 대비 태세에 돌입한다.

    1937년 4월1일부터는 야간 등화관제를 실시했고, 건물법 등을 변경해서 건축물이 폭격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 및 시공을 하도록 했고, 각 마을 단위의 방공호와 대피호를 마련하고, 물자에 대한 단계적인 배급제와 식량 비축에 나섰다.

    1938년 봄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방어할 준비가 끝났다. (전국토의 요새화 완료)

    1938년3월12일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

    1939년3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1939년 8월30일 스위스는 전시체제로 전환. 43만5쳔명의 민병대 동원령

    1939년 9월1일 새벽 4시 20분. 독일의 폴란드 침공 - 세계 제2차 대전 발발

    독일의 세 차례 스위스 침공 계획 작성

    1940년 6월 멩겔스 계획

    1940년 10월 타넨바움 계획

    1943년 뵈메 계획

    스위스를 얻는 자가 유럽을 얻는다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전략 요충지에 위치한 스위스. 그런 스위스의 영세중립국도 그냥 공짜로 주어진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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