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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11.17

아막성전투는 어떠한 전투였는지 궁금합니다.

백제와 신라의 아막성전투는 국운을 놓고 싸웠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막성전투는 왜 일어났고, 아막성전투로 백제와 신라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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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02년에 신라와 백제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였고 삼국시대 후반부를 알리는 전투로이 전투를 시작으로 무왕,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맹공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신라 또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서부 전선에 대한 강화를 시작했습니다. 진지왕이 의문의 폐위를 당하고, 즉위한 진평왕은 각종 국가 기관 설치와, 전쟁 영웅을 측근으로 삼는 등의 정치적 수완을 통해 왕권 강화를 이뤄 나가게되었고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당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했고, 고구려 - 왜국과 함께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감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돌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신라에 대한 압박 수위를 낮출수 밖에 없었으며, 왜국도 내부 사정이 혼란스러워졌기에 무왕은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했다고합니다. 아막성 전투는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대승으로 끝났으나, 오히려 아막성은 이후에 등장하지 않고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아막성 이동 이북 지역에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진평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공을 받게 되고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의 북경 지역을 침공하며, 백제는 동부 전선 곳곳에 병력들을 보내어 성들 공략했으며 김유신, 알천같은 무장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선덕여왕 대에 신라는 망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라고합니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진흥왕 대의 영광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국가 존망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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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막성 전투란 602년, 신라와 백제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전투인데 삼국시대 후반부를 알리는 전투로, 이 전투를 시작으로 무왕 -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맹공을 시작하게 되었고,신라 또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서부 전선에 대한 강화를 시작했습니다. 결과느 신라군의 대승이었느데 40,000명에 달하는 백제의 대군이 궤멸당했으며, 총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사비성으로 돌아왓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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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막성은 경상남도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경계 부근인 팔량치 고개에 위치합니다.

    602년 아막성 공방전에서 신라는 백제 무왕이 보낸 대군을 맞아 반격을 감행해 최종적으로 승리합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01년 왜가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해 신라를 협격할 것을 제안한 기록이 있습니다. 601년 고구려, 백제, 왜 삼국이 신라를 협격하기 위한 협약을 맺은 것을 알수있는데, 602년 4월 왜가 병력 2만 5천을 큐슈지역에 집중시켰으며 신라에 상륙하기 위한 선박도 마련합니다. 백제도 병력 규모4만을 갖추었는데 이는 일순간에 동원한 것이 아닌 오랜 기간을 두고 철저히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 신라는 이들을 각개 격파해야만 하는 위기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왜가 신라를 협격하려던 순간 2가지 중대한 대외변동이 있었는데 602년 초반 수의 지원을 받던 동돌궐의 계민가한이 서돌궐의 달두가한을 격퇴시키고 승리, 초원에 대한 수나라의 영향력이 한층 확대되자 수와 적대적인 고구려는 직후의 정황 변화를 지켜볼수 밖에 없었고 수가 서돌궐을 격파한 동돌궐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나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유보시키기에는 충분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602년 6월 왜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섭정 성덕태자의 동생 내목황자가 병석에 누웠고 왜군의 신라출병이 연기,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가 단독으로 신라를 먼저 공격하는데 아막성 전투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602년 8월 백제 무왕은 지리산을 돌파해 남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일단의 군사를 출동시켜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요충지인 아막성을 포위, 이에 신라 진평왕은 포위된 아막성을 구원하기 위해 수천의 기병을 급파합니다.

    신라 원군이 백제군을 격퇴시키고 아막성의 포위를 푼 직후 신라의 새로운 대규모 원병이 도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 가운데 귀산이라는 청년 장교가 있었고 신라 원군은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해 아막성 서쪽 앞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 4개의 요새를 건설합니다.

    아막성은 4개의 자성으 ㄹ거느린 모성이 되며 이후 모산성으로 불립니다.

    방어망을 보강한 신라군은 백제에 대해 역공을 단행, 아막성에서 남원 방향으로 진격하는데 신라군이 몰려오자 백제 무왕은 좌병 해수에게 4만 병력을 주어 이를 공격하게 했고, 남원과 운봉의 광활한 지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천산성 부근의 전투가 특히 치열했습니다.

    백제의 유인술에 걸린 신라군이 늪지까지 들어갔고 철수를 단행하려하다 백제군의 역습을 받고 사상자가 속출, 이때 신라 장군 무은이 백제군에게 잡힐 위기에 처하나 아들인 귀산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동료인 추항과 뛰어들었고 귀산, 추항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지는데 후퇴하면서 이를 본 신라군이 귀산과 추항을 구하기 위해 다시 진격합니다.

    아버지를 구하려는 귀산의 혈투가 신라군을 분발시켰고 여기서 아막성 전투의 승기를 잡게 되며 백제의 4만 대군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신라군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아막성 전투에서 승리하자 603년 7월 왜의 신라침공계획이 취소, 그해 8월 고구려가 신라 서북의 본영인 북한산성을 포위하나 진평왕이 친히 병력 1만을 이끌고 북한산성에 나타나자 위세에 눌린 고구려군은 철수합니다.

    602년 고구려, 백제, 왜 3국의 협공 계획은 신라에게 있어 최대의 위기였고 국제 정세 변화가 신라의 위기 국면을 타개한 것도 있으나 아막성 에서 신라군이 백제 대군을 맞이해 수세적인 입장에 있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 면이 높게 평가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대승으로 끝나나 아막성은 이후 등장하지 않고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아막성 이동 이북 지역에서 이어지는데 아막성 역시 이후의 사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결국 신라의 승리는 전략적 가치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이후 진평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공을 받게 되고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의 북경 지역을 침공, 백제는 동부 전선 곳곳에 병력들을 보애 성들을 공략합니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진흥왕 대의 영광이 사라지고 국가 존망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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