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신종 때 만적의 난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일어나게 되었는가요?
고려 때 관심이 많아서 여러 자료를 찾아 보다가 신종 대 만적의 난이 일어났다고 알게 되었는데요.
만적의 난은 어떠한 이유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적의 난은 1198년(신종 원년) 5월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노비들이 시도했던 봉기입니다. 1170년 무신 정변으로 문벌 사회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동요하였습니다. 이의민 같은 사람은 노비에서 권력이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층민의 삶은 문벌이 지배하던 시기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무신은 토지와 노비를 늘려 세력 기반을 강화하였고, 농민과 천민에 대한 수탈도 확대하였습니다. 이에 삶이 피폐해진 농민과 천민은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를 드러냈으며, 대규모로 봉기를 일으켜 지배층의 토지 침탈과 가혹한 수탈을 바로잡으려 하였습니다. 만적과 같이 신분 해방을 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은 만적이 난을 도모할 당시 연설 내용입니다.
최충헌의 노비 만적 등 6명이 북산으로 나무하러 가서 노비들을 모아 놓고 “우리나라에서는 무신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候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가! 시기만 잘 만나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만 어찌 뼈 빠지게 일하겠는가! …… 최충헌과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 땅의 천민을 없애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고려사>
그러나 만적의 봉기는 내부자의 고발로 실패로 끝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170년 고려 중기 일어난 무 신의 난은 당시의 정치혼란과 함께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합니다.
중앙정부는 정치투쟁과 권력다툼으로 관리기능이 약화되었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화, 결국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농민과 노비에 의한 반란까지 유발시켰는데 그 중 가장 대규모적이고 목적이 뚜렷한 것이 만적의 난 입니다.
즉 노비해방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상전을 죽이고 스스로 공경대부가 되자는 주장으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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