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의 난은 1198년(고려 신종 1)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입니다. 1170년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의 정치혼란과 함께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하였습니다. 중앙정부는 정치투쟁과 권력다툼으로 관리기능이 약화되었으며 괸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였으며 하층민에 대한 과중한 세금과 착취가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상층겨층과 하층계층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 농민과 노비들에 의한 반란까지 일어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고 목적이 뚜렷하옇던 것이 만적의 난 이었습니다. 당시 최충헌의 사노로서 6명의 노비들과 함께 모의하고 정중부의 난 이후 공경대부는 노비에서 많아 나왔으니 우리도 난을 일으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난을 일으키자고 논의합니다. 난을 오의하던 중 율학박사 한충유의 사노의 고변으로 난은 실패로 끝나고 만적을 비롯해 많은 노비들이 강물에 던져져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무신정권으로 기존의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무너졌습니다. 무신 최고권력자 중 이의민은 천민 출신으로 무신정권기에는 다양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천민이라도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신분상승 욕구를 크게 만들었고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이 왕후장상이 따로 있느냐며 천민봉기를 일으켰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