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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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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이 없는 이유가 있나요?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집단이 유림이 없는데 민족대표 33인 명단에 유림이 한 명도 포함되지않고 참가하지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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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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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은 개신교 16인, 천도교 15명과 그리고 불교 2명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손병희를 중심으로하는 천도교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한규설, 박영효, 윤치호 등에 접촉하였으나 별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개신교, 불교, 가톨릭, 유교 등의 종교계 인물들과 접촉하여 대표를 꾸렸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과 유교는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 대표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혼란스러워 뒤늦게 2명(한용운, 백용성)만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3.1운동의 기미독립선언 대표성 문제와 김윤식의 '독립불원서'의 유림 대표성 문제로 유림은 격분하였습니다. 이들은 기미독립선언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여 유림들은 1919년 3월 곽종석을 대표로 한 영남 유림과 김복한을 대표로 하는 호서 유림 등 137명이 유림단의 이름으로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을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33명은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규설 윤용구 이완용 박영효 윤치호와도 접촉하였습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개신교 불교 가톨릭 유교 등의 종교계 인물들과 접촉하여 민족 대표를 꾸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가톨릭과 유교는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2명만 참가하였습니다. 유교는 학파별로 참가 여부를 놓고 갈등하다가 호남의 거물 유림 간재 전우는 머리를 깎은 자들의 복국운동은 유림으로서 상종할 일이 못된다고 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심산 김창숙은 이제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참가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영남학파에서 2명을 파견했으나 모친의 와병으로 늦게 도착하여 서명에 참석치 못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