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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하늘소43
소탈한하늘소4323.04.18

실학의 유래는 어떻게 되고, 누가 만든 학문인가요?

조선후기에 실학이 유행했다고 하던데요, 실학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가요? 그리고 실학은 누가 만든 학문인가요?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개발된 학문인가요? 아니면 중국의 학문에 기반을 둔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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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둥이를찬양하자입니다.


    원래 실학이라는 명칭은 "실사구지시학" 의 약칭입니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중국 서한 경제의 아들 헌왕의

    "수학호고 실사구시" 라는 말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스타박스입니다.

    실학이란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주로 ‘공허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과 대비되어 사용되어 왔던 용어입니다.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한 이래, 참된 학문에 대한 추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 왔는데, 어떠한 학문이 참된 학문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당연히 그 학문이 전개되고 있던 사회의 특성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최승로는 유교를 불교에 견주어 실학이라고 지칭하였다고 하며, 고려 말기 성리학자들 또한 도교와 불교를 허학이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성리학이야말로 실학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실학은 유교 본연의 경전을 충실하게 연구하는 경학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실학은 현재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을 통칭하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는 크게 두 계열로 나뉩니다. 유형원을 비롯한 중농주의 학파와 박지원을 위시한 북학파가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실학의 창시자로 보통 반계 유형원(1622~73)을 꼽습니다.

    반계 유형원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부안에 은거하면서 그의 필생의 역작 반계수록을 집필하여 조선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촉구하였습니다. 반계수록은 무려 20여 년 간의 연구를 통해 탄생한 대작으로, 중국 및 고려, 조선의 각종 법제를 다양하게 고찰한 끝에 개혁안을 이끌어낸 책입니다. 전제, 교선지제, 임관지제, 직관지제, 녹제, 병제, 군현제 등 각종 사회제도에 대해 자세하게 자신의 개혁론을 개진하였습니다.

    유형원은 정전제의 이상이 바로 공전(公田)에 있다고 보고 개인의 이욕만을 위한 사전(私田)을 배격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후 이를 귀천의 차별을 두어 재분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유형원은 당시의 토지 제도가 항상 변화하는 인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 기준이 명확하지 못하여 폐단이 생겨나 몇몇 부유한 가문에만 토지가 집중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구가 아닌 토지를 기준으로 삼는 공전제를 실행하여 당시의 여러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유형원은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토지제도 개혁을 바탕으로 사회의 각종 제도를 이에 맞추어 정비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비록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개혁론이어서 그의 주장이 그대로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개혁론이 가진 의미와 그 궁극적인 목표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공감하였습니다.

    근기 남인의 학통을 이은 성호 이익은 실학을 조선 학계에 단단히 뿌리내리도록 한 학자로 평가됩니다. 이익 또한 유형원과 같이 전제 개혁에 주목하였다. 당시 토지가 지나치게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비판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익은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설정하는 한전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하한선 이하의 토지는 대대로 영세토록 농사짓는 토지로 두어 사적인 매매를 엄금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이들이 조그마한 토지라도 소유하여 농사지을 토지가 없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익의 아버지와 형은 붕당간의 정쟁으로 인해 희생당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익은 붕당의 폐해에 대해서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붕당은 곧 이해관계를 두고 서로 싸우는 데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라 파악하였습니다. 이해관계가 절박하기에 붕당이 심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되면 될수록 붕당 또한 고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관직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 경쟁이 심해지는 것이 붕당의 폐해가 끊이지 않는 이유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인 효렴과나 현량과를 개선책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호 이익의 문인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 학풍을 익혔습니다.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던 행정 관료로서, 뛰어난 실무 능력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실로 방대하고도 뛰어나 후대 연구자들의 실학 연구가 그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끝없이 학문에 정진하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대저술을 남겼습니다. 정약용 또한 토지개혁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요.. 양반과 부호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과 유민으로 전락해가는 당시 상황 속에서 그는 토지 개혁을 통해 지주제도의 폐해를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두 단계로 나뉘는데,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작성된 토지개혁론에서는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여전론의 여(閭)는 자연적인 지형을 기준으로 획정된 하나의 구역을 뜻합니다. 한 여의 가구수는 대략 30가구 내외로 봅니다. 여 여섯이 합쳐지면 이(里)가 되고, 이 다섯이 합쳐지면 방(坊)이 되며, 방 다섯이 합쳐지면 읍(邑)이 됩니다. 여에는 여장이라는 지도자가 있어 엄격하게 지휘합니다. 여의 토지는 해당 여의 여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장으로 땅주인에 구별 없이 오직 여장의 명령에만 따릅니다. 여장은 농경에 종사한 개개인의 노동량을 기록하고, 가을이 되면 세금과 여장의 봉급을 제외하고 수확물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것입니다.

    이후 노론 낙론 계열의 북학파는 북경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청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을 주창하였습니다. 이용후생, 경세제민의 기치를 내걸고 특히 상공업의 육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중상주의 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라 부르기도 합니다.

    박지원은 서경에 나오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용후생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용이 있고서야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이 있고서야 바로 정덕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박지원이 이용후생에 주목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의 주장은 항산(恒産)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을 이은 것이며, 경제와 사장(詞章)이 의리의 전제조건이라는 홍대용의 주장과도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지원은 실학의 주체를 사(士)로 설정하였습니다. 사의 학문이 농공상의 이치를 포괄해야 하고 농공상의 일도 사가 있어야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여,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사의 책무를 단순히 학문과 정신 수양에만 두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는 수레 도입을 주창하는 등, 청으로부터 배워 상공업을 촉진시키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박제가 역시 경세제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용과 후생 가운데 하나라도 소홀하다면 정덕을 해친다고 하여 이용과 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박제가는 농업 생산력의 증진뿐만 아니라 상업과 유통 및 외국과의 통상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많은 학자들이 말단의 일이라고 천시하였던 상업에 주목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레・선박・도로 등의 기반시설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 진다면 마음의 공부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실학과 조선 사상계를 지배한 성리학과의 관계는 아직 더 밝혀야하지만, 유형원, 이익 등 남인 계열의 학자들과 박지원, 박제가 등 노론 낙론 계열 학자들의 목표는 분명하였습니다. 바로 조선 사회의 오래된 병폐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앙 정계에 있는 관료들도 사회 개혁이라는 목표에는 동의하였지만 이들은 그리 급진적인 개혁론을 내놓을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유형원이나 이익, 정약용 등은 정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에 오히려 중앙 정계에서 내놓을 수 없는 과감한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비록 조선의 현실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을지언정, 홍대용, 박지원 등의 북학 또한 신선한 주장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논란이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실학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