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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4.13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나서 어떤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급을 했나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나서

보급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 같은데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보급을 했나요?

딱히 백성들이 다닐 교육기관도 없었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보급이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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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에 세종임금이 1443년 겨울에 집현전신하들을 불러모아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가르친 내용이 나옵니다. 글자 모양, 글자 쓰는 보기, 그 속에 숨은 뜻, 간단하고 무궁하게 뜻을 통하게 하는 소리글자로 쓸 수 있는 원리와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이 대목은 정인지 서문에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훈민정음을 일반 백성들에게 알리는 과정에 관해서 자세하게 기록된 내용이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한다고 해서 10월 9일 한글날 행사를 하지만 사실 이때 반포를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실록의 기록에는 단지 '훈민정음'해설서를 완성했다는 내용 뿐입니다. 다만 훈민정음 창제 후에 반포를 준비했다는 내용이 언급되는 부분은 있습니다.

    이후 언문청을 만들어서 언문으로 용비어천가를 쓴다든가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한다든가, 혹은 과거시험에 훈민정음을 출제한다든가 해서 훈민정음을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월인석보와 같은 불경 언해본에는 훈민정음의 서문과 예의편을 언문으로 실어서 훈민정음을 배우는 교재로 삼았다고 봅니다.

    과거시험에 출제할 정도같으면 이미 어느정도 언문을 보급한 상태이거나 책자 등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상태일 것인데 나중에 연산군 시대에 들어서서 언문을 보급하지도, 배우지도 말라는 왕명을 내려 그때 그런 책자가 대거 사라지지 않았나합니다.

    백성에게 훈민정음을 알리는 일에는 아무래도 훈민정음해례본과 같은 책을 교육기관(향리,서당 등)의 선생들이 공부한 다음에 백성에게 가르쳤을거라고 봅니다. 해례본을 얼마나 찍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당시에 교육기관의 선생들은 받아보거나 비슷한 책을 구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이 즉위한 지 28년이 되던 1446년 9월,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세종은 관리들도 훈민정음을 익혀 사용하고, 죄수들의 조서나 판결문뿐만 아니라 국왕이 내리는 문서인 교서도 한자와 훈민정음을 함께 쓰도록 하였다. 사대사상에 젖은 일부 관리들은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특히 최만리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고 주장하였다. "지금 문화적으로 가장 앞선 곳은 중국이고, 중국의 문화를 배우려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 "쉬운 새 문자를 배워서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누가 한자를 배우고 누가 유교 경전을 공부하겠는가."

    세종은 이러한 주장을 물리쳤다. 만일 이때 우리글이 만들어지고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중국 문자를 빌려 쓰는, 문화적으로 미숙한 민족에 머물렀을 것이다.

    훈민정음으로 지은 최초의 글은 <용비어천가>이다. 이는 조선 왕실을 찬양하는 노래로, '조선 왕조가 하늘의 도움으로 세워졌으며 왕들이 모두 성인처럼 훌륭하니, 영원히 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임금에게 충성하는 민 만들기', 이 또한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민을 가르치기 위한 문자'라는 뜻의 '훈민정음'이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하였고, 세종은 사람들 간의 서열이 분명한 왕조 국가의 최고 통치자였다. 왕실이 국가와 거의 동일시되는 시기였다.

    민들은 한글을 쉽게 익혀 나갔다. 문자를 익힌 민들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문화적 수단,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 생겼다. 관리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심지어 왕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벽보를 만들어 곳곳에 붙였다. 이에 놀란 연산군은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훈민정음을 만들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9.03.04., 전국역사교사모임)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양반들의 무시를 받았지만, 궁궐과 양반집 여자들이 훈민정음을 쓰기 시작한 뒤 훈민정음의 편리함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독창적인 우리 고유의 글자를 가지게 되었다. 훈민정음은 우리나라 국보 70호이고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여, 불경이나, 많은 서적들은 한글로 번역. 출판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한문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을 어엿삐여겨, 새로운 지식과 서민의식을 발달을 꽤했습니다.

    다음은 한글로 책을 번역하라는 세종의 지시입니다

    세종 119권, 30년(1448 무진 / 명 정통(正統) 13년) 3월 28일(계축) 2번째기사

    상주사 김구를 불러들여 《사서》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다

    상주사(尙州使) 김구(金鉤)를 역마로 부르다. 구(鉤)는 상주사(尙州使)가 된 지 반년도 못되었는데, 집현전(集賢殿)에서 어명을 받들어 언문(諺文)으로 《사서(四書)》를 번역하게 하였다. 직제학 김문(金汶)이 이를 맡아 했었으나, 문(汶)이 죽었으므로, 집현전에서 구(鉤)를 천거하기에 특명으로 부른 것이며, 곧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제수하였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글이 발달 하고 봅급되는데는 한글 소설의 역할이 컸습니다. 조선 후기 문학에서는 한글 소설이 크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한글 소설은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회 모순을 비판하거나, 서민들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였지요.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첩의 자식인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앨 것과 차별 없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염원을 담아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를 비판하였지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춘향전』은 춘향이라는 기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신분 차별의 부당함을 주장하였어요. 뿐만 아니라 양반의 횡포에 맞선 백성의 저항 의식도 보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한글은 우리 서민들에게 흘러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