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중에 바로크 음악이 가장 많은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클래식 음악은 르네상스 시대의 바로크음악, 고전음악, 낭만파 음악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당시 유명했던 작곡 가까운데 바하와 베토벤과 모짜르트 등이 모두 바로크시대의 작곡가였기 때문에 바로크 시대에 많은 클래식음악이 작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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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에 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당연합군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우리땅에 야욕을 품고 공주에 웅진 도독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비롯하여 여러 도독부를 설치 했을뿐 아니라 심지어는 경주에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까지 지배하려 하였지요 신락ㄴ 당과 한때 연합한것은 삼국 통일이 그 목적이 이었으므로 이와같은 당의 야욕에 격분하여 백제 땅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안동도호부를 만주로 쫓아내며 대동강과 원산 이남의 땅을 통일 하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잃고 민족 자체 문제 해결에 있어서 다른 민족을 개입시켰다는 흠이 있긴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하나의 정부아래 단일민족으로서의 발전할 토대를 이룩하겠다는 점에서 그의 의가 매우 큰 것입니다 즉 고구려를 멸망시킨후 당나라를 쫓아낸 후부터 통일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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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은 왜??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렇습니다 이방원은 형제를 다 죽이고 왕위에 바로 오를 수 있었지만 대신들의 반대를 생각하며 형을 왕위에 올렸죠 그러나 형은 오랫동안 왕을 할 수가 없어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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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이 형제들을 다 죽인이유가 뭔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방원이 형제들을 다 죽인 이유는 결국은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함이었죠 그러나 이방원이 백성의 존경을 받던 신하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노력한 왕입니다 신문고를 만들어 백성들의 억울함을 달랬고 노비를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없게 하는 등 여러 제도를 고쳐 나라를 안정시켰지요 그리고 태조 때 지은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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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조선시대의 왕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조선 최고의 왕은 뭐니 뭐니 해도 한글을 만들고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세종대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세종대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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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가 불교에 비해 늦게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주교가 불교의 비해 늦게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천주교는 서양에서 발달을 하였고 불교는 동양에서 발달 하였기 때문에 조선과 가까운 인도나 중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천주교 보다 빠른 시간에 전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만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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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암행어사는 실제로 있었던 직책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에 암행어사가 있었지요 유명한 학자였던 퇴계 이황도 암행어사 였어요 이황은 34세에 대과에 급제한후 대제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지요 특히 40대 초반에는 암행어사로 임명 되어서 충청도에 파견되었답니다 충청도를 돌면서 탐관오리의 횡포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암행어사는 확실히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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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최초의 추상화가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추상화가는 이성자 화가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세계적인 추상회화의 거장이죠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프랑스 화단은 물론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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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김이박 씨가 많은이유?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성씨중 유독 김이박 씨 성이 많은 이유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김알지, 김수로왕, 박혁거세 같은 김씨 박씨는 왕조의 후예였는데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성을 쓰는 것은 양반들만 쓸수있는 일종의 특권이었죠 조선시대에서 전체 인구의 80%는 성이 없는 평민이나 천민이 었는데 이 천민들이 성을 갖게 된 역사적인 배경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신분계급 타파에 있습니다 1909년 "민적법" 이라는게 실시되었는데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접하는 이름 돌쇠 개똥이도 이때부터 성과 이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죠 이때는 호적 담당 서기가 마음대로 이름을 지어 주거나 노비의 경우는 모시고 사는 상전의 성을 따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지역에서 유명한 성씨를 같이 쓰기도 했는데요 예를 들어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전주 이씨로 경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경주 김씨나 경주 최씨로 정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양반들의 성을 따르다보니 김이박씨가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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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실제로 폭군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전란으로 인한 피해와 세금 때문에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위해 세금 제도 개혁안인 대동법을 반포 하였고 대동법은 간단히 말해서 땅을 가진 사람이 원래 내던 토지세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내던 세금을 대신 더내는 세금 법인데 즉 땅이 없는 농민들은 세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었고 당연히 지주들과 평소에 광해와 반한 길을 걷던 서인들의 불만은 더 커지게 됩니다 이에 멈추지 않고 광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고 경희궁을 준공하며 왕건을 굳건히 했고 이외에도 호패법 재실시 동의보감 반포 등 백성의 삶이 안정되도록 많은 힘을 썼습니다 그 중에서도 광해군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중립 외교를 꼽을 수 있는데 명과의 명분을 저버리지 않는 한편 후금과의 관계도 적절히 유지하며 실리를 극대화하는 정책이었죠 나라가 망하더라도 의리와 명분을 지켜 후금과 전쟁 하고 있는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서인들은 광해의 중립외교 때문에 불만이 극에 달했지만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었지요 다만 광해군을 싫어했던 서인들의 수작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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