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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 바위그림이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법흥왕과 진흥왕을 비롯한 신라의 왕과 귀족, 승려, 화랑의 활동을 알리는 253점의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한자 명문 및 근대 명문들과 함께 새겨졌다는 점에서 천전리 각석의 기하문은 한국 문자의 역사를 이해하는 생생한 선사 및 역사 자료로 가치와 의미를 평가받고 있다.-출처:울산역사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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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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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교도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메이플라워호(Mayflower)는 1620년 잉글랜드 출신 이민자 102명을 북아메리카 대륙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까지 수송한 플뢰위트선이다. 미국인들은 이들을 ‘필그림 파더스(순례자)’라고 부른다. 선박의 승무원은 25에서 30명 정도였고 이민자 102명중 35명만이 청교도(Puritan)였다. 이들 35명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와의 갈등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했다고 알려져 있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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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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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타지마할은 어떤 목적으로 세워진 건축물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굴 제국의 5대 황제인 샤 자한의 아내 뭄타즈 마할은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낳고 나서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죽었다거나 병이 나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평소 아내를 극진하게 사랑했던 샤 자한은, 그녀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주기로 계획하였다.이후 샤 자한은 1632년부터 무려 2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공들여 흰 대리석으로 타지마할을 건설하였다. 영묘의 건설과 장식 작업은 1648년에 끝났으나, 주변의 정원과 부속 건물들은 5년 후인 1653년에 완공되었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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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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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거서간이라는 칭호는 언제부터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서간은 박혁거세가 처음 말을 할 때 스스로를 '알지거서간(閼知居西干)'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로부터 거서간이 왕을 이르는 존칭이 되었다고 한다. 거서간은 수장을 의미하는 '간(干)'에서 파생된 호칭으로, 여러 수장들 중에서 대표적인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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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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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마립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의 제18대 임금. 김알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의 조카 이찬 대서지(大西知), 어머니는 아찬 석등보(昔登保)의 딸인 이리부인(伊利夫人) 석씨이다. 같은 김씨 왕족이지만 전대 왕인 내물이나 다음 왕인 눌지와는 3촌 또는 4촌의 관계에 있다. 내물 마립간의 뒤를 이어 3번째 김씨 왕으로 왕위에 올랐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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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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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 운동 전개 양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의병 전쟁은 전국을 활동 범위로 하고, 광범한 사회 계층을 망라하였으나, 우세한 무기를 보유한 막강한 일본의 정규군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봉건적 지배 질서의 유지를 고집하는 양반 유생층의 지도 노선으로 인하여 결속이 강화되지 못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요된 후에는 외교권이 상실되어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국제적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의병 전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그러나 의병 전쟁은 집권층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인 형태였고,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아가, 의병 전쟁은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고,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항일 민족 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 전쟁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 침략이 극심하던 시기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사에서도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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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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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들의 처우개선 얘기가 나오면 항상 언급되는 전태일이라는 분은 어떤 일을 하셨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여 남대문국민학교를 다녔다. 1963년 대구에서 살다가 다시 1964년 상경하여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고,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후 다락방 철폐, 노동조합 결성 지원, 노동조건 개선 시위 기획 등을 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 항거하였고, 그 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청계노조와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전태일의 분신 자살은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 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7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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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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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이쇠가 출토된 곳과 역사적 가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최근 중요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철정의 출토지는 경주 및 낙동강유역의 부산·김해·대구·창원지역과 영산강유역으로, 이 두 곳이 2대 분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철정은 판상 철제품에서 발달되었고 그 발생지역은 낙동강유역이었다고 추정된다. 그 발전과정은 부산 동래 복천동고분군이나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형식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일본지역에서의 철정의 출현과 소멸은 한반도와 같은 시기이다. 철정이 교환가치를 가지고 양 지역에서 유통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일본열도의 철정은 형태나 두께에서 볼 때, 신라지역보다는 낙동강이나 영산강의 가야·마한지역에서 공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가야(金海伽倻)·안라가야(安羅伽倻)·마한·왜 등 이들 여러 지역은 수요·공급관계에서 하나의 경제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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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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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친일파들에 대한 숙청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친일파 숙청법은 미 군정의 반대와 방해에 여러 번 난관을 겪었다. 당시 미 군정은 일제강점기의 관료기구 유지와 친일 관료 등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미 군정 내 행정관료는 친일파 또는 그 두둔 세력으로 채워졌는데 그중에는 조선총독부 체신국 출신 길원봉, 조선총독부 교통국 출신 최원경 등이 있었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1월 기준 1,157명 중 949명, 즉 82%가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이었다. 미 군정의 주도 아래 친일파는 남한 사회의 주요권력에 손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 친일파 숙청법이 통과되자 미 군정은 인준을 거부하며 선 선거법 후 친일파 숙청법 제정을 강요했고 이는 입법의원 내에서 친일파를 두둔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친일파 청산은 미 군정에 의해 정부수립 이후의 과제로 미뤄졌으나 1948년 출범한 이승만 정부 역시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승만은 귀국 후부터 일관되게 친일파 처단에 부정적 견해를 취했고 정부에 친일파 출신 인사를 등용했다.-출처:덕성여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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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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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오계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광법사라는 스님이 가르쳤고, 충효를 말하고 있어서 유교와 불교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기 신라 사회에서 유교와 불교는 아직 그 뿌리는 깊이 내렸다고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이 진평왕의 즉위 불과 30년전인 지증왕 때이며, 그전까지 사용했던 각종 호칭(특히 차차웅)이 신권정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라에서는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무속신앙이 지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신라 특유의 신앙을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 혹은 풍류(風流) 라고 불렀는데, 세속오계는 이러한 당시 신라인 특유의 사상이 압축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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