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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트리나 2세는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 러시아 여제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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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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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중 성군이였던 여왕이 누구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진성여왕은 정강왕의 믿음에 보답하듯 즉위하자마자 죄수를 대사(大赦)하고 모든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했다. 그녀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는 애민군주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에게는 자신의 구상을 집행할 인재들이 없었다. 선덕·진덕을 보필했던 김춘추와 김유신같은 인재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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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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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고지식한 분을 꼰대라고 합니다. 꼰대라고 하는 분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꼰대의 가장 명확한 특징. 능력, 인품, 신분 등을 모두 배제한 채로 오직 짬밥만으로 서열을 정해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경력이 적거나 신입인(해당 조직에 자신보다 늦게 합류한 동료)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노예로 대하고 마구잡이로 부려먹는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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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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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공자는 만두를 즐겨 먹었다고 하는데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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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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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어머니는 왜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도 대비라 부르지 않는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궁호를 받은 경우엔 당대에 궁호를 호칭으로 쓰긴 했지만(숙창궁, 가순궁 등), 후대에 궁호가 통칭으로 굳어진 건 '혜경궁' 뿐이다.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된 경우에는 '생전에 받은 존호+대비'의 호칭으로 많이 불리는데(인수대비, 자순대비 등), 혜경궁은 대비가 되지는 못했지만 대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사실상 이 궁호가 존호 대신으로 쓰인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인 듯하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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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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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베스트셀러라고 불리우는 삼강행실도는 어떤 내용들을 담고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강행실도》는 조선 세종 16년 직제학 설순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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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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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은 어느 시대 때 만들어진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양도성은 1396년 태조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세종, 숙종, 순조 시기에 보수 공사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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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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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있어 호족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언제입니까?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호구 실태를 알 수 있는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33년에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문서이다.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695년(효소왕 4), 815년(헌덕왕 7), 875년(헌강왕 1) 등으로 여러 견해가 있는데, 장적에는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청주 지역)과 그 부근 4개 촌락의 호수(戶數), 면적, 인구, 우마(牛馬), 토지, 수목(樹木)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신라 촌락문서는 신라 통일기 무렵 국가의 수취체제와 당시 촌락민의 삶을 이해하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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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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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종직은 왜 부관참시를 당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해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어 사후에 부관참시되었다가 종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화려한 문장보다는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문장에 뛰어나 『점필재집(佔畢齋集)』을 비롯한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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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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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맛골의 의미와 유래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종로를 지나다 말을 탄 고관들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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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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