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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대장경판은 목적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불교에 대한 믿음으로, 대장경을 새로 만들어 불교의 힘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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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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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활자는 어느 시대부터 등장 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금속활자는 고려 숙종 때 1102년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정설로 취급되지 않고, 상정고금예문을 1234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습니다.공민왕 때인 1372년 직지심체요절이 고승 백운화상에게서 써졌습니다.
학문 /
미술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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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옷고름 방향에도 의미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복의 옷고름 방향은 오른쪽 방향으로 향하도록 합니다. 단, 착용자 기준에서 오른쪽 입니다.옷고름 방향에 대해서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학문 /
역사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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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말 사치가 심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비가 되고 사치, 도박 , 유흥으로 밤새도록 연극을 보거나 무도회를 즐기는 방탕한 생활을 했고 도박을 좋아하긴 했지만 잘 하지는 못해 빚을 많이 지기도했으나, 이는 당대 귀족 문화에서 필수에 가까운 코스였습니다.당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적당한 사치와 유흥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필수 선택이었습니다.루이 16세 즉위 후 기록되어있는 왕실 비공식 재정 지출 목록에 따르면 1789년 까지의 왕실 소비 금액은 대략 2억 2천만 리브르였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예산 중 자신이 쓸 수 있는 금액 한도의 10%도 쓰지 않았습니다.이는 약 100만 리브르에 가까운 금액인데, 100만 리브르 라고 해도 당시 금 가격을 바탕으로 환산하면 대략 1천 2백억에 달하는 거금이기 때문에 아무리 상대적으로 사치를 덜 했다고 해도 반대층 입장에서는 사치를 하긴 했다 라는 것이 됩니다.
학문 /
역사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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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의 오류 란 무슨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허수아비 때리기는 논증의 한 종류이며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을 곡해함으로 발생하는 비형식적 오류입니다.상대방의 입장과 피상적으로 유사하지만 사실은 비동등한 명제로 상대방의 입장을 대체하여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을 반박하는 것이 허수아비 때리기 입니다.
학문 /
문학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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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책을 만들어 판매하는 서점이 존재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서점은 없었으나 집에서 책을 찍어 팔거나, 직접 돌아다니며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이를 방각본 이라 합니다.
학문 /
역사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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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유산을 어떤식으로 상속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상속은 혈연상속으로, 상속인의 순서로는 1 . 자녀로서 적자녀, 첩자녀, 양자녀이며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고 또 부모보다 먼저 사망한 자녀의 자손, 즉 손자녀에게 대습상속이 인정되었으며 적자녀에는 제사를 승계하는 계후자가, 양자녀에는 3세 전의 수양자와 3세 후의 시양자가 포함되어있었습니다.2. 자녀가 없는 경우 생존배우자로 남편은 처 사후에 처의 유산을 상속한 후 친자녀에게 다시 상속하였으며 처는 개가하지 않으면 남편과 같았으나 배우자의 상속은 종국적인 것이 아니라 처분권이 제한된 종신수익권이었으므로 만약 친자녀가 없는 경우 그들의 본족이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유교가 보급되면서 제사가 중요해짐에 따라 자녀 없이 사망한 처의 재산은 그의 본족보다 봉사자가 상속하는 경우가 후대로 갈수록 늘었습니다.3. 배우자나 자녀가 없는 경우 4촌 이내의 혈족인 본족, 즉 사손이 상속을 하며 그 순서는 형제자매, 3촌조카, 4촌형제, 3촌 숙부, 숙모, 고모, 이모, 4촌형제자매입니다. 이러한 상속인이 없으면 상속재산은 국가로 귀속되어야 하나 대개는 자녀가 없으면 양자를 들여 재산을 물려주거나 마을에 재산을 귀속시켜 그 재산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학문 /
역사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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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道聽塗說)이라는 사자성어의 뜻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도청도설은 길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곧 그 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는 뜻입니다.거리에서 들은 것을 남에게 아는 체하며 말함,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예사로 듣고 말함의 의미를 가집니다.
학문 /
철학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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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생애와 주요 업적에는 무엇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관은 덕수 ,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입니다. 1536년 음력 12월 26일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했습니다.1548년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 백인걸에게 학문을 배웠고 1554년 금강산 마하연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으나 이듬해 하산해 외가인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을 짓고 다시 성리학에 전념, 자경문은 입지, 과언 등 11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운 것입니다.22세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 이듬해 예안에 낙향해있던 이황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고 1558년 별시에서 천문, 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을 지어 장원 급제, 1564년 실시된 대과에서 문과의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해 삼장장원으로 불렸습니다. 생원시, 진사시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해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대과에 급제한 1564년 정6품 호조좌랑으로 관직에 나선 뒤 예조와 이조의 좌랑을 거쳐 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등의 대간의 직위에 있었고 1568년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69년 홍문관 부교리로서의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던 춘추관 기사관을 겸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정철과 함께 경세제민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을 써 선조에게 바쳤습니다.1570년 관직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에서 학문에 전념, 1571년 청주목사로 다시 관직에 오르나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 율곡촌으로 거처를 옮기고 1573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역임, 1574년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를 써 선조에게 바쳤고 그 해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되나 이를 사양하고 낙향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관직에 올랐고 그 뒤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했습니다.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575년 선조에게 제왕학의 지침서인 성학집요를 저술하여 제출하였고, 1577년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격몽요결을 편찬, 1580년 기자실기를 저술, 이 무렵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1581년 대사헌과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며 다시 관직에 올라,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냈으며 1582년 이조판서, 1583년 병조판서가 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바치며 시반양병설 등의 개혁안을 주장,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 등으로 임명되었습니다.1584년 음력 1월16일에 49세의 나이로 서울 대사동에서 죽었습니다. 죽은 뒤 파주 자운산의 선영에 묻혔으며 1624년 문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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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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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팔괴 혹은 삼기팔괴에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기팔괴는 경주의 예로부터 세 가지 진기한 보물과 여덟가지 괴상한 풍경이 있는 것으로 금척, 옥적, 화주 가 삼기이며남산부석, 문천도사, 계림황엽, 압지부평, 백률송순, 금장낙안, 불국영지, 나원백탑, 서산모연, 금오만하 는 팔괴 입니다.
학문 /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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