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최초에 동물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차재우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은 창경원 동물원으로 1909년에 개원하였습니다.1909년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각종 동물과 식물을 수집하고, 일본으로부터 코끼리·사자·호랑이·곰·낙타·원숭이·공작 등 인기 있는 짐승과 파초·바나나·고무나무 등 열대식물을 수입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이 때 전시된 동물은 70종 500여 마리에 달하였습니다.그러나 이 동물원의 설립은 국권을 빼앗긴 순종에게 동식물이나 감상하며 세월을 보내라는 저의에서 행해진 것이었기에 망국의 뼈아픈 설움이 담긴 개원이었습니다. 순종이 이를 공개하여 온 백성이 구경할 수 있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창경원으로 개칭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서울의 명물로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세계 최초의 동물원은 쇤부른동물원 입니다. 오래된 동물원이기 때문에 화려한 구석은 없지만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구경할만 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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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는 왜 포루투갈의 식민지였었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1840년 영국이 아편전쟁을 도발하였고 청은 완패했다.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수많은 이권을 받는다. 포르투갈도 이에 편승해 1851년과 1864년에 원래 마카오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무인도인 타이파와 콜로안을 점거하고 1887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마카오를 정식으로 포르투갈 영토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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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대의 철갑기병은 어느정도 수준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 또한 철갑기병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북아 최고였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합니다. 개마무사를 활용하여고구려는 오늘날의 전격전 개념의 전술을 구사하였고 당시 당나라 군대를 박살냈습니다. 당 황제 이세민이 안시성 함락 못하고 도망갈때그들을 추격하여 박살낸 것이 개마무사입니다. 당나라는 당시 동북아 패권국이 었습니다. 그리고 그 황제도 전쟁의 휴유증으로 죽고 말죠.그리고 죽으며 유명한 마을 남기지요. 다시는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라. 죽는 순간까지도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런 유언을 남겼을까요. 개마무사는 긴 기병창(삭)을 주무기로 사용했으며 보조무장으로 환두대도를 사용했습니다. 각궁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적의 진형을 충격력으로 분쇄시키는 중기병의 목적을 볼 때 실재 여부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신라와 가야에도 철갑기병이 있었으나, 이들은 고구려와 달리 찰갑이 아닌 판갑을 써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몹시 떨어졌습니다.다시말해 당시 고구려 개마무사는 동북아 최고수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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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노비안건법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후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는 왕건 이래로 호족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광종 때에 이르러 과거제 시행, 사색공복제(四色公服制) 제정, 칭제건원(稱帝建元) 등과 함께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습니다.당시 호족은 후삼국의 와중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갚지 못했든지, 아니면 그 밖의 강제적인 방법으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소유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비는 호족이 소유한 토지와 함께 그들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되었고, 이는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918년(태조 1) 태조는 노비가 된 양인 가운데 1,200명을 방면시켰고, 그 후에도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였지만 호족의 반발로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이에 956년(광종 7) 광종은 노비의 안검을 명령하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회복시켰는데, 이것은 호족에게 귀속되던 세(稅)를 국가에 환원시키고 호족의 사병(私兵)을 감소시킴으로써 호족의 약화와 왕권의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족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으며, 심지어 광종의 비(妃)인 대목왕후(大穆王后)까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폐지하지는 못하였다. 경종 때 호족의 반발이 더욱 격화되자, 987년(성종 6) 노비환천법을 실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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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난 것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고대의 국가들의 성립에는 항상 신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로마제국, 그리스도 신화가 있고 영국, 프랑스도 그렇습니다.우리나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들을다스려야 한다는 이끌어야 한다는 완벽한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고그 명분이 신화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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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관련영화를 보다 궁금한게 있어 문의드려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사도세자가 어린 시절에 총명하고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그러나 세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조와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친절한 훈육을 받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이 도탑지 못하였던 것은 여러 문제를 낳았습니다. 게다가 대리청정을 맡은 이후 세자가 신임의리의 완전한 실현 문제와 관련하여 영조의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문녀(文女, 숙의 문씨)와 그 오빠 문성국(文聖國) 등 궁중 세력과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 일부 노론 세력이 연합하여 세자의 지위를 흔들고자 각종 무함을 주도하였고, 여기에 일부 소론 탕평당도 호응하여 갈등 국면을 조성하는 등 세자의 지위가 점차 흔들리게 되었습니다.한편 1757년(영조 33)에 왕실 내에서 세자를 매우 아꼈던 조모 인원왕후(仁元王后)와 법모(法母)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연이어 사망하자, 세자는 이들의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보호막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에 빠졌습니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하는 소동을 벌인다든가 정신병 증세에 따라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세자는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로는 궁중 내 무함 세력의 술책으로 인하여 세자가 영조를 알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는 등 부자간은 더욱 소원해졌고, 그 틈을 타 각종 무함이 난무하는 등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세자도 이제는 난국을 타개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고, 노·소론 일부 대신들의 보호 노력만으로는 사태를 미봉하는 데에도 벅찬 상황이었습니다.1761년(영조 37)에는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이후(李 玉+厚) 등 보호론계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고, 세자는 평양까지 미행(微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대 과실을 범하는 등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영조는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결단의 방식을 궁리하였던 듯합니다. 게다가 이제는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장성해 있었고, 1762년(영조 38)에는 혼례까지 무사히 마친 상태였다. 이해 5월에 홍계희의 겸종(傔從) 출신인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하여, 결국에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결국 윤5월에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화변(禍變)의 방식으로 세자를 폐위하였습니다. 그 후에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세손에게 동궁(東宮)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습니다.임오화변의 결과, 공석이 된 동궁(東宮)의 지위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世孫)이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손은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서 종통(宗統)을 계승하였습니다.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비상식적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새롭게 정파가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더구나 정조는 임오화변에 대한 재평가를 탕평 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임오화변은 영조대 후반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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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독살이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기록된 내용은 없습니다. 인조에 의해서 독살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 공식적으로는 병으로 인하여 사망했습니다.인조는 소현세자가 서학을 배우고 자신에게 삼전도 굴욕을 주었던청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청의 2인자섭정왕 도르곤은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여차하면 인조를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왕위에 세울 뜻도 내비칩니다. 부자사이의 갈등이 극대화될 수 밖에 없없습니다. 하지만 독설에 대해서는 추측만 가능 할 뿐 우리가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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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사대주의가 중시되어 중국에 조공을 했을까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는 중국이 분열되어 있을때는 중국과대등하게 싸웠고 고려초 까지만 해도 중국과 다른또다른 황제국이었습니다. 고구려시대에는 수당을격파해 버리기도 하지요. 하지만 고려중기이후몽골의 침입이후 중국에 굴복하였고 그것이조선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속국개념이아니라 전략적인 사대관계라고 보는게 맞을것 같습니다. 우리가 조공무역을 통해 더 많이 얻었고중국도 우리의 내정에는 크게 간섭할수 없었습니다.따져보면 중국도 한족이 이민족에게 여러차례 정복당했으며 피지배계층으로 상당시간을 살아 갔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완전한 굴복은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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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이라는 말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구한말, 일제 강점기 시대에 가옥에는 지렛대원리의 펌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때 마중물을넣어 주어야 지하에 있는 물이 나오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일을 추진할때 마중물 역할중요한역할을 대변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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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삼국지 시대는 실제 있었던 역사 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역사에 기반해서 나관중이 쓴 소설이어서과장된 부분도 많고 허구의 내용도 많습니다.중국의 삼국지 시대 우리나라는 고구려 신라백제 삼국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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