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지게는 옛날 언제 부터 사용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지게의 최초사용 기록으로는 1690년 <역어유해>에 배협자(背狹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유물로는 무안 양장리 유적에서 지겟자루가 출토되었고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도 지게의 부품인 지게 발채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고 하는데여.학계에서는 <위지 동이전>의 삼한조에 "나라 안에 공사가 있거나 관가에서 성을 쌓을 때는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새끼줄로 한 발(丈)이나 되는 나무를 꿰매고 온종일 외치며 일을 하며 아파하지도 않으며 그것으로 일 잘하고 건장한 것으로 여긴다."는 기록을 지게를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여. 이로 미루어보면, 최소 AD3세기경 삼한 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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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향후 전망은 어떻게 보시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철학의 영어 단어인 ‘Philosophy’는 그리스어로 사랑을 의미하는 ‘Philia’와 지혜를 의미하는 ‘Sophia’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지식에 대한 사랑이나 지혜에 대한 열정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상황의 원인과 궁극적 목적에 대한 일련의 반영과 지식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를 통해 존재, 지식, 이성, 도덕, 미, 마음, 언어, 종교 등과 관련된 다양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기 떄문 입니다. . 기본적으로 철학은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학문은 바로 왜 그럴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 플라톤도 아리스토 텔레스도 다 여러가지 일을 했지만 결국은 철학자 였습 니다. 철학이 없는 공부나 학문은 마치 팥 없는 호빵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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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석탑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석가탑이 제일 보존 가치가 높을 것 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문가들이 1966년 석가탑 안의 사리 장치의 안위를 살피기 위하여 해체 해보았는데 그 때 깜짝 놀랄 만한 유물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두 번째 층 지붕 돌 중앙에 변길이 41cm, 깊이 19cm 크기의 사리공이 있었고 안에 사리 장치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 안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이 나온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 들 목록 입니다. *사리 장치 안의 유물들 1. 금동제 사리 외합 1점 2. 은제 사리 외합 1점 3. 은제 사리내합 1점 4. 금동 방형사리합 1점 5. 동경 2점 6. 청동비천상 1점 7. 동제 차자 4점 8. 의향, 유향 3봉지 9. 은가락지 2점 10. 무구정광다라니경 2점 11. 묵서지편 1축 12. 섬주 약간 13. 곡옥 1점 14. 홍마뇌 환옥 12점 15. 수정 환옥 1점 16. 수정 절자옥 17. 수정 보주 형옥 1점 18. 녹색 유리환옥 1점 1점 19. 담청색 유리제과형옥 1점 20. 유리제 소옥 약간 21. 향목편 약간 22. 수정 큰 구슬 1점 23. 홍마뇌 13점 24. 목탑 12점 25. 침향편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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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은 고종 13년(1876) 병자수호조약 이래 부산·원산·인천 등이 차례로 개항되면서 서양인과 일본인 거류민의 수적 증가로 양식 주택과 일본식 주택들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최초의 서양식 주택 건축은 고종 21년 건립된 세창 양행의 사택이라고 하네여. 건평 173.15평, 일부 2층의 벽돌집으로 외벽은 회칠 이고 붉은 기와를 얹었다고 합니다. 인천 북성동의 죤스턴 별장은 석조 4층 연건평 452.98평으로 옥상에 물탱크를 마련한 스팀난방으로 새로운 난방법을 주택건축에 보급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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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철학"이라는 단어가 무슨 깊은 뜻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Philosophy라는 철학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로는 哲學 이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학문',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학문' 정도로 이해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위키 피디아 영어 사전에는 "philosophy" means, "love of wisdom." In a broad sense, philosophy is an activity people undertake when they seek to understand fundamental truths about themselves, the world in which they live, and their relationships to the world and to each other.즉, 넓은 의미로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가 누구 인지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는 적극적인 행동방식이라고 정의라고 되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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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거 금모으기 운동에서 금은 얼마나 모였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IMF 당시 대한민국은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에 이르렀다. 전국 누계 약 351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18억 달러 어치의 약 227톤의 금이 모였다고 하네요. 환율을 1200원으로만 잡아도 2조가 넘는 엄청남 금을 모았네여.지금은 그 금이 어디에 있는 지 매우 궁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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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나쁜 정책에 대해서 알려주세요.ㅣ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누구나 사람 인지라 완벽 할수는 없겠지요. 우선 첫 번째로 4군 6진 개척당시, 백성들을 강제 이주 시킨 사건입니다. 고향땅에서 잘먹고 잘살고있던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날씨에 적응 못해 동사 하거나 먹을게 없어 인육을 먹었을 정도로 이주민들은 고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덕분에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모든 한반도 영토를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화폐 개혁입니다. 당시 물물 교환 위주로 돌아가던 경제체제에 강제로 화폐를 도입하여 화폐로만 거래토록 한 법입니다. 이는 철저히 실패해서 백성들이 폭동 직전까지 가서야 비로소 정책을 취소합니다. 마지막으로 윗사람을 고발 하지 못하게 한것 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고을의 수령이 악한 짓을 했을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고발할 수 없는 법입니다. 태종때 폐지 되었던게 다시 부활합니다. 또한 능력이 출중 하다고해서 부패한 관리를 벌주지 않은 사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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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어떻게 탄생한 국가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싱가포르는 과거에 우리와 비슷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간략한 역사를 소개 하자면 우선 1819~1942년: 영국 식민지를 겪었고 , 1942~1945년: 일제 강점기를 3년간 겪고 해방 후에 , 1945~1965년: 독립에 이은 합병을 말레이지아에 의해서 당하고 , 1965~1970년대: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해서 현재의 독립 국가의 형태를 유지 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정치적으로 왕은 없고 수상(총리)제를 택하고 있는데 이 총리는 특별하게 거의 종신직 입니다. 그래서 1대 수상인 이관유 수상은 59년부터 90년까지 30년을 했고 지금의 리센롱 총리는 2004년 부터 지금까지 약 20년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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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음반판매량이 가장 높은 가수는 누구일까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올해 우리나라 가수의 음반 판매량을 따지면 누적 앨범 판매량은 당연히 방탄소년단(BTS)이 약 600만 장으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스트레이 키즈와 세븐틴이 각각 2위와 3위를 기록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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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내용중에 거짓은 전혀 없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왕조 실록이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쓰여 졌는가는 다음 일화로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연산군(재위 1494~1506)도 왕의 자리에 앉아 역사가들이 차후에 나를 어떻게 묘사하여 기록할지 무척 궁금해 했다고 합니다. 폭군의 이름으로는 기록되고 싶지 않는 탓이었지요. 연산군이 1498년 7월 13일 왕조실록 열람에 대해 전교(傳敎:임금이 명을 내림)했다고 합니다. 몇 차례 열람코자 했으나 관리들이 말을 듣지 않자 특별한 영을 내린 것이었다 합니다.“홍문관, 예문관에서 <실록>을 보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는데 평상시라면 이 말이 맞다. 그러나 지금은 큰 일을 상고하려고 하는 것이고 반드시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래도 완강히 불가하다고 하니 의금부에 내려 국문(鞫問:나라에서 중대한 죄인을 심문하는 일)하도록 하여라”그래도 여러 대간들이 “예로부터 사초(史草:사관이 기록한 사기의 초고)는 임금이 보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했지요. 국문이 온당치 않습니다”라며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끝내 듣지 않았지요 .연산군과 신하들은 그 뒤로도 사초 열람을 두고 보이지 않는 힘 겨루기를 했다고 합니다 . 이른바 사초 열람 사건인데요. 폭군이라는 절대 권력자 앞에서도 사관들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바 기록 자체는 아마 수정하거나 고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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