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수레를 먼저하는 유래가 궁금하군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의지할 곳 없는 고씨라는 노파가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호의로 끼니를 이어 가며 연명한다. 얼마 뒤 고씨 노파가 세상을 떠나자 들일을 하던 사람들은 죽은 고씨 노파를 생각하고 음식을 먹기 전에 첫 숟가락을 떠서 “고씨네!” 하고 허공에 던져 그의 혼에게 바치게 되었다고 하며, 그 뒤로 이 행위가 전국에 퍼졌다(경상북도 안동 지방).그러나 경기도 양평에서 채록된 유형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여러 가지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어느 대갓집의 하녀가 겨울에 냇가로 빨래하러 갔다가 떠내려 오는 복숭아를 먹고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는다.이름을 복숭아에 연유하여 ‘도손(桃孫)’이라 짓는다. 도손은 장성함에 따라 총명하여졌지만, 천한 출신이므로 주위의 멸시를 받는다.그리하여 중국으로 가서 풍수를 배우던 중, 그의 선생이 어머니(고씨)가 운명하게 됨을 가르쳐 주어 고국으로 돌아온다. 어머니의 시신 묻을 곳을 찾아 전국을 돌다가 자리가 좋은 김제 만경들에 몰래 장례를 지내고 중국으로 다시 건너간다.그 뒤, 어느 해에 만경들에 흉년이 들었는데, 도손 어머니 묘의 옆에 있는 논 주인이 임자 없는 무덤이 된 그 묘를 치장하여 준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사람의 논은 흉년을 벗어나게 되고, 이 소문이 번져 그 근처 논 주인들이 몰려들어 임자 없는 무덤을 손보아 주는 일에 참여하자 그들 역시 흉년을 벗어난다.그 뒤 매년 그 묘는 치장되었고, 먼 곳에서 이 소문을 들은 농부들은 그곳까지 갈 수가 없어, 대신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면 첫 숟가락을 떠 도손 어머니의 영혼에 바치게 되었다.이 이야기에서는 몇 가지의 현상이 부각된다. 첫째, 원시적 생활양식의 단면을 암시하고 있다. 고수레를 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체하거나 혹은 재앙을 받게 된다는 속신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수레!” 하는 그 행위 자체는 불양(祓禳 :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물리침.)을 위한 주술로 이해된다.
Q. 사그라나 피말리아 성당의 높이에 담긴 의미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그라다'는 스페인어로 성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파밀리아는 가족을 뜻하기 때문에 성가족 성당이라고도 불린다.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책임졌다.이 건물 중 일부인 가우디가 작업한 탄생의 파사드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며,2010년 11월에는 성당 내부가 완성되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집전하는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현재 2022년 기준으로 140년째 공사가 진행중이며, 비용은 관광객하고 신자들 헌금과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가우디 서거 100년 주년에 맞춰 완공 시기를 2026년을 목표로 하였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기한내 준공이 불투명하다.완공 시 건물 크기는 가로 150m 세로 60m, 높이 170m로 예상된다.
Q. 영국이 대항해시대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식민지의 경영은 경제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영국은 인도와 본토를 연결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인수하고, 아프리카를 종단으로 개척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조선을 대륙 침략의 기지로 활용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식민지 개척을 통한 국수주의적 열망 충족은 산업혁명 시절에 만연한 각종 정경유착 및 기업비리 및 노동착취, 산업재해, 빈약한 사회복지제도와 분배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은 극심한 양극화 등 각종 사회문제로부터 하층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좋은 소재였다. 또한 종교적 열망, 국가적 위신, 군인 등의 일자리 보전 등이 동인으로 꼽힌다. 또한 식민지 지배가 경제적으로 생각보다 이득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가 많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국가경제 전체로 볼때나 그런것이고 정치가들이나 식민지에 자본금을 투자한 식민지에 거점을 둔 관료들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Q. 일본의 막부시대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권력이동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전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에도 막부를 세운 이후로, 근세 일본은 200년 넘게 에도 막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막부 체계는 도쿠가와 가문의 근거지인 에도[3]에 세워진 막부가 300명 정도의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 위에 군림하고, 또 각 다이묘가 많은 수의 하급 사무라이들을 거느리고 번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봉건제였으며, 다이묘 밑으로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이루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오랜 내란을 끝내고 확고한 지배체계를 구축하였고 조선 원정 실패의 여파도 안정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 시대 동안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상공업이 번성하였으며 문화도 융성하였다.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무라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하급 무사 계급[4] 내에서 에도 막부에 대한 여론은 악화 일로로 접어들었다. 지속적 평화와 방만한 국가 경영의 시기 동안 사족의 지위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으며, 막부는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자연재해와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무리 무술과 학문을 수양해도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마음대로 뜻을 펼칠 수 없는 현실에 분개하는 사족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막부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끌려온 조선 유학자들[5]을 통해 전래된 성리학이 융성하면서, 성리학 특유의 통합적이면서도 수직적인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정치 사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된 일본'이라는 생각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또한 성리학이 중국 사상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본 고유의 정신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국학이 발생하고 유행하였는데, 국학은 일본 토착 종교인 신토와 결합하여 천황을 숭배하는 사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때문에 점차적으로 천황을 막부보다 더 높게 쳐주는 풍조가 발생하였다.점차 쇠약해져가던 막부의 지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들을 끌고와서 '평화적으로 교역에 응하는 것'과 '교역을 거부하는 대신에 전쟁을 감수하는 것' 중에 양자택일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쿠로후네 사건) 사실 일본인들은 서양의 열강들이 동아시아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페리 제독의 내항보다도 한참 전부터 듣고 있었으며, 특히 1840년의 아편전쟁에서 자타공인 동아시아 최강국인 청나라가 어떻게 대영제국에게 묵사발이 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도 막부는 아예 처음부터 서양 국가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중국이라는 더 큰 먹이에 골몰하느라 일본이 문을 닫아걸자 일본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미국의 경우는 달랐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서 출발한 증기선이 북태평양을 가로질러서 일본 근해까지 오면 증기 기관의 연료인 석탄을 보급받아야 했기 때문에, 미국이 아시아로 진출하려면 일본에 안정적인 보급항을 확보할 필요가 있어서 일본의 개항에 보다 진심이었다.사실 일본은 국토의 폭이 좁고 길기 때문에 모든 주요 지역이 바다에서 멀지 않아서 바다로부터의 공격에 취약하고,[6] 특히 막부가 있는 에도와 천황의 황궁이 있는 교토는 만약 미국이 아편전쟁의 영국군처럼 군함의 함포 사격 지원을 받은 해병대로 공격해올 경우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7] 결국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의 주도 아래, 막부는 청나라처럼 얻어맞느니 평화적으로 통상조약을 맺기로 했다. 이때 막부가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겪게 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관세권을 박탈당해 해외의 공산품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없고,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을 줌으로써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처벌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아편을 금지할 수 있는 조항을 넣은 것이 막부의 수확이었다.한편 막부도 개항에 대한 여론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비난을 피하고자 위로는 천황의 허가를 받고[8] 아래로는 다이묘들과 회합을 열어 여론을 수렴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과거 힘으로 다이묘들을 찍어누를 수 있었던 막부라면 하지 않았을 이 꼼수는 결국 막부의 거대한 자충수가 돼 버렸다. 당시 고메이 천황이 '짐은 이인[9]이 싫다'며 결재를 자꾸 미뤘고, 다이묘들과의 회합은 서양 국가에 대한 결사항전을 외치는 성토장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오히려 막부의 권위가 크게 실추됐고, 막부는 천황의 허가도 받지 못한 채로 모든 다이묘가 반대하는 조약에 서명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한편 일단 미국과 조약을 맺게되자 영국을 비롯한 다른 서양 국가들도 몰려왔고, 막부는 이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Q.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역사적 가치는 어떤게 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의 각 면에는 내부에 꽃 형태의 무늬가 있는 안상(眼象)이 2구씩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16엽의 연판이 돌려졌다. 중대는 이 승탑에서 가장 조각수법이 뛰어난 부재로써 거의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용과 같은 얼굴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가운데 거북을 중심으로 총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쥐고 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구름무늬를 가득 채웠다. 상대석에는 큼지막한 8엽의 앙련이 조각되어 탑몸돌을 받치고 있다.탑몸돌에는 문비와 자물쇠, 사천왕상(四天王像), 광창(光窓)이 표현되어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 비천과 구름을 표현하였다. 지붕돌 윗면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귀꽃이 달려 있는데, 일부는 파손된 상태이다. 상륜부에는 둥글넓적한 복발 위로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올려져있다.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승탑의 기본형인 팔각원당형 구조를 잘 따르면서도 조각의 세부수법에서는 고려 특유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