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예전 흉노 말갈 여진족들은 어느나라가 됬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흉노=훈=Mongoloid 공식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 오늘날 Hungary는 이 Hun이 만든 국가 라는데 Hungary에 가보면 몽골로이드의 인종적 특성은 별로 없다.거란족의 후손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현재 1.중국인, 2,몽골인, 3.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외러시아 인 으로 흡수되어 흔적이 없다물길/말갈이 고구려에 신종(臣從)하였고 발해의 시조 - 대조영 과 그 아버지 대종상 /동생 걸걸중상, 걸사비우가 물길계 인 것으로 보이나 발해 대조영 은 스스로 자기네 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고 하니 우리가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가 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다계통을 따지려면 하나는 생물학적인 유전/혈통 관계를 짚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분석을 해야 할 것 인데 두 가지 모두 현재의 연구성과가 확실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Q. 산업혁명 전후시기에 노동자들의 근로시간과 실태는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세기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공장이나 기계 등 생산수단을 사유한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해 제품을 만들고 자본을 얻는 자본주의 경제가 탄생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고용주와 노동자 관계에서 이뤄지고 있어 노동 환경 정비와 노동자의 권리 같은 문제도 자본주의 경제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보스턴대학 사회학 교수인 줄리엣 쇼어는 이런 자본주의 경제를 낳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일반 노동시간은 현대보다 짧았다고 말한다. 13세기 영국 농민의 노동시간은 연평균 1,620시간이었다고 한다. 14세기 후반 농민 임금이 상승했을 때 많은 노동자가 매일 일하는 건 거부하고 일반적인 수입을 얻을 만큼 날짜만 일을 했다고 한다. 14세기 영국 노동자의 경우 연간 노동시간은 240일×6시간=1,440시간으로 추정된다.중세 유럽에선 1일 작업은 해가 나고 질 때까지 여름이라면 16시간, 겨울은 8시간이었다. 또 일하는 틈틈이 아침과 점심, 낮잠, 저녁 식사와 휴식이 있었고 노동은 일시적이었다. 이런 휴식 시간은 근로자의 전통적 권리로 인정받았고 농업 비수기에는 풀타임이 아닐 때도 많았다. 쇼어 교수에 따르면 15세기 영국 농민의 노동시간은 연간 1,980시간 정도였다고 한다.또 중세 달력에는 휴일이 많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여름휴가 외에 교회가 설정한 성인 휴식일이 많았다. 이런 휴일에는 교회에서 식사하고 축제에 참여했다. 중세 영국에선 1년간 3분의 1이 휴가였다고 한다. 또 동시대 프랑스에선 52일 일요일, 90일 휴식, 38일 휴가로 설정했다고 한다. 1년 중 180일 그러니까 절반이 휴가였던 것이다. 이는 16세기 잉글랜드 북동부 더럼시에서 주교를 지낸 신부의 수기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자본주의 경제가 도입되기 이전 중세 농경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끊임없이 일했다는 이미지를 받기 쉽지만 이 이미지는 현대 작업 패턴을 역투영한 것이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쇼어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의 시간을 노동에 빼앗기게 된 건 자본주의 경제가 태어나 가장 오랜 시간 착취당하던 19세기 중반. 예를 들어 1840년 영국 노동자는 연간 3,105시간에서 3,588시간을, 1850년 미국 노동자는 3,150시간에서 3,650시간 동안 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 미국에선 노동 환경을 검토하는 법 정비가 진행되면서 1987년 노동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평균 근로시간은 연간 1,949시간으로 줄였다. 또 1988년 영국에선 제조업 종사 근로자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간 1,856시간까지 개선됐다는 보고도 있다고 한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Q. 병마사라는건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중앙군의 지휘관이다 이들은 평시에는 임명되지 않고, 비상시 군의 출동이 필요할 때 임명되었다. 이 제도는 북방의 특수지역인 동계(東界)·북계(北界)의 양계(兩界)에 각기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두어졌다. 구성은 병마사(3품) 1인, 지병마사(知兵馬事, 3품) 1인, 병마부사(兵馬副使, 4품) 2인, 병마판관(兵馬判官, 5∼6품) 3인, 병마녹사(兵馬錄事) 4인이었다.또한 양계 병마사에는 위치가 미상인 고정적인 영(營)이 있었고, 영리(營吏)도 있었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관직의 이름이면서 관제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양계 병마사는 989년(성종 8)에 처음 설치되었고, 현종 때에는 군사적 기능 외에 행정적 기능이 추가되었다. 정종(靖宗) 초에 6개월 임기제가 정해지면서 지방제도로 확정된 것 같다.1039년(정종 5)에 병마녹사 가운데 1원을 감축하였다. 무신란 이후에는 문반 위주였던 양계 병마사·지병마사 등에 무반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 또한 양계의 방수장군(防戍將軍)에게 병마판관을 겸대하게 했다가, 1198년(신종 1)에 병마부사로 승격하였다.이후 몽고의 침략으로 이들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양계 병마사 제도의 존재의의가 거의 상실되었다. 1290년(충렬왕 16)의 북계 수복과 1356년(공민왕 5)의 동계 쌍성(雙城) 수복 이후 양계 병마사가 다시 파견되었다.그러나 이 때는 이들 지방에 제사(諸使)가 빈번하게 임명, 파견되는 상황이어서, 그들의 지위와 기능은 자연히 격하·약화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전국이 전쟁터로 되었다. 이에 따라 1362년(공민왕 11)에 동경도(東京道) 등 12도에, 이듬해에는 안동도(安東道) 등 13도에 병마사를 파견, 병마사의 전국적인 배치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양계의 병마사는 그 명칭이 군사적 기능을 나타내고 있는 점, 강력한 지방병력이 배치된 북방 변경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점, 『고려사』 백관지의 ‘곤외(閫外 : 궁궐 밖)를 전제(專制)한다’는 기록 등으로, 흔히 북경(北境) 방위사령부 및 그 최고사령관인 것으로 생각되어왔다.그러나 제도(諸道)의 일반 지방관·안찰사(按察使) 등의 군사행동과 비교해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지방장관으로서의 행정면의 기능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군사·행정 양면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Q. 고려시대 2성 6부는 어떤 조직체제였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982년(성종 1년)에 3성 체제가 도입되어 내사성, 문하성, 상서성이 설치되었는데, 기능이 밀접한 내사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내사문화성이 되어 최고 정무 기관으로 기능했다. 1061년(문종 15년)에 내사성이 중서성으로 개칭되면서 중서문하성으로 되었다. 당나라 제도에서는 3개의 관청이 각기 제 기능을 하는 3성 병립제였는데 반해, 고려에서는 2성 체제를 이루었다. 중서문하성이 국가의 정무를 의논하는 최고의 정치 기관이었고, 상서성은 결정 사항을 실천하는데 그쳤다. 즉 상서성과 중서문하성은 상하 종속 관계에 있었다. 6부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의 순이었다. 최고 정치 기구로서의 중서문하성의 권한과 지위는 고려 후기에 오면서 도병마사의 후신인 도평의사사로 옮겨갔다. 학계 일부에서는 중서문화성을 하나의 관부로 보는 것은 오류이며, 중서성과 문하성을 병칭하는 말일 뿐 3성제였다는 주장도 있다.
Q. 고려시대 공음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공음전(功蔭田)은 고려시대에 관료들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를 말한다.음서와 마찬가지로 5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주어졌으며 수조권을 세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가문의 역사가 길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공음전이 늘어나며, 그에 따라 가문의 경제력이 폭증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벌귀족의 경제력을 책임지는 제도이다.경종 대에 전시과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개국공신과 그외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토지가 주어졌던 것이, 현종 대에 상속이 인정되었고, 문종대에는 이게 양반공음전시라는 이름으로 법제화가 되었다. 공양왕 대에 이름만 공신전으로 변했을 뿐, 고려가 멸명할 때까지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