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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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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보가9 그래픽 디자인 및 영상 편집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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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외국에도 떄를 미는 문화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때를 미는 목욕문화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가까운 일본에조차도 있질 않습니다.일본에서 우리나라에 관광차 왔다가 때밀이 목욕을 하고 잊지 못하여 입소문이 퍼지면서지금은 때밀이 목욕이 아주 유명한 관광 상품이 되었습니다.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때를 밀지 않습니다.다만 샤워를 할 뿐입니다.그래서 목욕탕이라고 딱히 불리울 만한 곳이 없습니다.대부분의 가정에 욕실이 갖추어져 있어 샤워는 충분히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간 한국 학생들은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때를 밀다가 물을 많이 쓴다고 혼(?)나기도 합니다.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죠.특히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경우는 화장실 바닥이 말라 있는게우리나라와 다른 점입니다. 따라서 때를 밀 공간 조차 없는 것이죠샤워는 욕조에서 하고 커튼을 반드시 하여 바닥으로 물이 나가지않도록 합니다.혹시 외국에 가셔서 샤워하실 일이 있다면 바닥에 물이 없도록 하는 것이중요한 에티켓임을 알아두세요유럽은 목욕을 하지 않아 발달한 것이 향수 입니다.때를 밀어 몸의 냄새를 제거한다기 보다향수로서 몸의 냄새를 다른 냄새로 바꾼다고 바야죠.때를 거칠게 밀면 피부가 쉽게 상하고 노화가 빠르다는 말이 있습니다.부드럽게 무리가 안가도록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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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근로자의 날이 이전에는 3월 달이 았다는데 왜 5월로 바뀐건가요??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매년 5월 1일은 메이데이라 불리는 국제적 노동절이기도 하다. 근로자의 날은 그 명칭과 날짜에 있어서 변경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은 1958년 이래 대한노동조합총연맹(약칭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해 행사를 치러오다가 1963년 4월 17일 단행된 노동법 개정 과정에서 명칭을 근로자의 날로 바꾸고 유급휴일로 정했으며, 1994년에 이르러서는 근로자의 날을 메이데이와 일치하는 5월 1일로 변경했던 것이다.오늘날 국제적으로 기념되고 있는 노동절의 기원은 자본주의가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던 180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6년 마르크스가 제1차 인터내셔널 강령에서 8시간 노동제의 법제화를 요구한 이래 8시간 노동제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19세기 후반 세계 노동운동의 중심적 문제였다. 한편 이러한 요구가 미국의 노동운동에도 수용되어 광범위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884년 5월 1일 미국의 방직노동자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하고 각 노조가 이에 호응하여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어 1886년 5월 1일 시카고의 '노동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8시간노동·8시간휴식·8시간교육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체포되었다. 미국 노동자의 시위는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제2차 인터내셔널 대회에 보고되었다. 이 대회는 미국 노동자의 5월 1일 시위를 기념하여 이날을 국제적인 시위운동의 날로 결정했다.한국의 노동계급은 일제강점기에는 각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를 중심으로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하여 행사를 치러왔다. 그러나 전평이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의해 와해됨에 따라 형식적 행사만 치러져왔으며,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명칭마저도 '근로자의 날'로 변경되었다. 이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민정으로 이양하기 위한 체제정비를 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1963년 4월 17일 군사정권은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 등의 개정을 통해 노동통제의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노동', '노동자'라는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계급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근로자'라는 개념으로 바꾸었는데 이때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도 공포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노동계급의 진출이 확대되고 노동운동이 급격히 활성화되면서 대한노총이 주도하는 종전의 근로자의 날(3.10) 행사와 의미는 형식화되고 5월 1일 메이데이가 복원되어 행사가 이루어지는 이원화 양상을 보였다. 1994년 1월 25일 정부는 근로자의 날을 5월 1일로 변경했으나 명칭은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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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9제지낼때 제사음식은 어떻게 준비하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십구재(四十九齋)는 불교에서 유래한 장례 의식의 하나로 고인이 죽은 후 초재부터 1주일(7일)마다 7번씩 지내는 재(齋)를 말합니다.​ 이 사십구재가 장례절차가 간소화하면서 탈상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산소에서 지내기도 합니다.그래서 제사의 일종으로 인식해서 49재(齋)를 49제(祭)로 쓰기도 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1) 준비하시려는 제수로도 충분하고 넘쳐 보입니다. 제수의 수량이 성의의 표현이라면 많이 할수록 좋겠지만 기제사에서 꼬막이나 소불고기는 잘 안쓰는 편입니다.​ (2), (3) 전통적으로 제수는 홀수개를 올리니 전, 과일, 조기의 숫자도 3, 5, 7에 맞추면 되겠습니다.​ (4) 49재도 제사이므로 산소에서 하는 성묘처럼 절을 하시면 됩니다.​ (5) 제사 후 음식을 나눠먹는 풍습을 “음복”이라 하지요. 산소에서 쓴 제수 음식은 가져와서 고루 나누어 드십시오 .​​​명절에 산소에 성묘가는 준비와 같이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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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축하할때 왜 케이크를 먹게 됐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케이크(cake)의 기원은 과자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과자는 신석기 시대부터 만들어 먹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우묵한 돌그릇에 밀가루와 우유를 넣고 섞은 뒤 그대로 굳혀 떼어낸 것이 바로 과자의 기원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변화와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과자는 가토(gateau, 진과자), 갈레트(galette, 팬케이크), 플랑(flan, 찐 과자) 등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인들은 이스트를 활용해서 케이크를 구웠고, 당시 사람들은 이집트인들을 '빵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그 후 8~9세기의 그리스에서는 이미 달걀, 유지를 넣어 만든 케이크가 100여 종에 달했다. 빵과 케이크의 명칭이 명확하게 분류된 것은 로마 시대부터였다고 하며, 11~13세기에는 십자군 원정으로 동양에서 설탕과 각종 향신료가 유입되어 케이크의 질과 맛이 높아졌고, 산업혁명을 통해 대중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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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 최초의 신발 회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제시대인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발회사인 "대륙고무공업"이라고 생겼습니다.처음의 생산제품은 물론 고무신이었답니다.외국상표처럼 상표가 특별히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리고 그 후 여러 신발회사들이 생겼습니다.삼화(범표, 1931), 태화(말표, 1947), 국제(왕자표, 1949), 동양(기차표, 1953), 진양(진양, 1963) 등은 고무화에서 포화와 케미화로 품목을 확대하면서 제조공정을 개선하고 제조기술을 축적해가면서 OEM 납품을 통해 세계 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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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콜라보라는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콜라보 (collaboration)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팀을 이루어 함께 작업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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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차례예법에 근거가 없다는데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홍동백서, 조율시이, 좌포우혜, 어동육서 등은 모두 근거 불명입니다.여기저기서 그렇게 하는게 마치 정해진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근거 불명이며..제삿상은 집안마다 다르기때문에 그것보다는 자기 집안에 내려오는 형식에 따라 하는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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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청와대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에 위치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이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하여 회의실·접견실·주거실 등이 있는 2층 본관과 경호실·비서실 및 영빈관 등 부속건물이 있고, 정원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후원 및 연못 등의 미관을 갖추고 있다.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1960년 8월까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명명으로 제1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명 ‘경무대(景武臺)’로 불려오다가, 그 해 8월 13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尹潽善)이 선출되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개명하였다. 이 명칭은 대리석으로 된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역사적으로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26년(세종 8)에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으로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 하였다.북악산 산록에 위치하여 서울 장안을 전망할 수 있는 이 경무대는 어영(御營: 조선시대, 인조반정 뒤에 조직한 군대의 하나)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으로서, 또는 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그리고 이 울안에는 원래 융무당(隆武堂)과 경농재(慶農齋: 조선 말엽 경복궁의 뒤뜰에 있던, 각 도의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못됨을 알아보던 집)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 후 1927년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 일본인이 조선총독 관저를 건립하였다.이곳을 제7·8·9대 조선총독이 관저로 사용하였고, 광복이 되어서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Hodge, J. R.)중장이 사용하다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정부로 이관되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동시에 경무대라는 이름을 되찾아 대통령 관저명으로 사용하였다. 이승만(재임 1948∼1960) 대통령은 6·25전쟁의 피난시절을 제외하고 1960년 4월까지 초대·2대·3대 대통령으로 보낸 12년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4·19혁명에 의한 하야와 함께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겼다.경무대라는 이름은 3·15대통령 부정선거 등 독재와 비정(秕政)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1960년 8월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그 뒤 1963∼1979년(5∼9대) 박정희(朴正熙), 1979∼1980년(10대) 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 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 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 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 김대중(金大中), 2003∼2008년(제16대) 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 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거쳐 갔다. 2017년(제19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입주하였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尹錫悅) 제20대 대통령이 관저를 용산 국방부 청사를 옮기고 기존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개방함에 따라 대통령 관저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청와대 경내 시설현황과 그 내력을 보면 ① 영빈관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로서 1978년 1월에 착공하여 그 해 12월에 준공이 되었다.이 곳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며, 외국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방문했을 때 우리 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되거나 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영빈관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고,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가 13m에 둘레가 3m인 기둥이며 내부는 무궁화·월계수·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② 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이며, 1989년 22명의 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많은 의견을 수렴한 뒤 1991년 9월 4일 신축되었다. 이 본관 건물 신축으로 외국의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이 방문했을 때 우리 전통의 건축양식을 통해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이 건물은 정부와 국가를 대표하는 우리의 얼굴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전통 목조 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내부 구조는 현대적인 감각과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으며, 우리 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지붕을 올리고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약 30만 장이나 되는 청기와는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내어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1층에는 대통령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 연회장, 식당이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 회의실이 있다. 그리고 건물 앞의 넓은 잔디마당은 국빈환영행사와 육·해·공군 의장대, 전통복식을 입은 전통의장대의 사열 등이 행해지는 곳이다.③ 수궁(守宮)터인 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지리학상 길지(吉地)로 알려져 890년 전인 고려시대에 이곳에는 남경의 이궁이 있었다.그러다가 조선시대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 곳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으며, 그 뒤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융무당·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또한 이곳은 농사가·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 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다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총독관사를 새로 지어 7·8·9대 총독이 사용했다.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용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높은 곳에서 보면 총독관사 건물은 大(대)자의 모양을, 총독부 청사건물은 日(일)자의 모양을, 서울시청 건물은 本(본)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세 글자를 이으면 대일본이 된다.그 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청와대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되었는데,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이다.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뒤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된 것이다.④ 비서실별관(신관) 및 동별관은 비서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서, 신관은 1969년에, 동별관은 1972년에 건립되었다. ⑤ 상춘재(常春齋)는 1983년 4월 준공된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되고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전통 한옥식 건물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우리 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던 차에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하여 전통 한식가옥인 상춘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혁을 보면 현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사로 건축된 일식 목조건물인 상춘실(약 20평)이 있었으나 1977년 12월에 철거하고, 이듬해 3월 천연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약 22평)로 개축하여 상춘재(常春齋)라 명명하였다.그 뒤 전통한식집을 형태 변경 없이 목재로 보수하는 공사를 1982년 11월 20일 착공하여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건평 116평의 건물을 1983년 4월 5일 완공하였다.⑥ 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고 일제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 1968년에 약 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했다.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 5월 28일에는 인근 주민 약 3,000여 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310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연혁을 보면 옛 경복궁의 후원으로 채소밭·가축사육장·온실 등의 부지였으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국내외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장 등으로 사용되었다.⑦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했던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껴 1990년 10월 25일 완공되었는데 형태는 전통한식(본채는 八作지붕의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이며 구성은 본채·별채·대문채·사랑채·회랑으로 되어 있다.⑧ 춘추관(春秋館)은 1990년에 완공되었으며,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린 건물이다.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우리 나라 언론사 기자 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로서 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담화발표 등을 하는 소회견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과 각종 문화행사 등을 하는 다목적실이 있다.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되었다.고려시대 시정(그 당시의 정사)의 기록을 맡아오던 관청으로 고려 개국 초에는 사관이라 하다가 1308년(충렬왕 34) 이를 문한서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고쳤다가 1325년(충숙왕 12)에 예문관과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했다. 춘추관은 다시 1356년(공민왕 5) 사관으로 개칭하였다가 1362년 다시 춘추관으로 되고 1389년에는 예문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환원되었다.조선 개국 당시에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예문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년(태종 1) 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프레스센터인 춘추관, 대통령의 살림집인 관저, 그리고 집무공간인 본관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재임시에 새로 지은 것입니다.구청와대 본관은 장소가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내방객을 맞기에 아주 불편했습니다. 1989년 2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수행원이 대기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청와대 신축이 결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대통령 살림집인 관저의 경우 일제 때인 1939년 미나미 총독이 들어온 이래 본관에 살림집이 있었는데 1990년 10월25일 새 관저가 완성됨에 따라 대통령 집무실과 살림집이 분리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1989년 8월 28일 착공됐으며 대지면적 1천2백60평, 본채 2백44평, 별채 1백58평 기타 부속시설을 포함한 연건평 8백12평의 1층 건물로 건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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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광해군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종, 세종, 성종 등은 왕이 승하한 후 종묘에 올려지는 시호입니다.하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되어 왕위에서 쫓겨났고 당연히 이러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이후 올려진 왕자의 군호가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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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말 200원짜리 동전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70년에 발행된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 기념주화라는 것으로 금화6종, 은화6종 해서 총 12개 주화가 1세트로 발행된 것이다. 그중에 하나에 액면가 200원짜리 주화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다른 주화 중에서는 25000원, 20000원, 2500원, 250원 같은 액면가를 가진 것도 있다. 기념주화에 대한 한국조폐공사 블로그블로그 내용에 따르면, 해당 주화는 전량 수출되었다가 일부가 다시 역수입되었다고 하며, 1세트에 수천만원의 가격으로 거래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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